● '신용경색 유령' 유럽 배회… 안개 낀 지뢰밭 더 공포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돈이 이리저리 물처럼 잘 흘러야 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든지 돈줄이 꽉 막히게 되면, 마치 심장근육이나 뇌세포가 괴사하듯이 경제도 시들어 간다. 이런 현상을 '신용경색(credit crunch)'이라고 한다.
지난 2008년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때 전 세계가 신용경색을 경험했다. 이 초대형 투자은행이 파산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니 아무리 특A급 은행이라도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은행들은 대출을 멈추었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현금을 최대한 확보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투자를 하더라도 부도확률이 제로에 가까운 미국 국채나 금 정도가 대상이었다. 대출은 꽁꽁 얼어붙었고 은행의 일상적인 자금결제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자연히 생산과 소비가 곤두박질치면서 경제가 얼어붙었다.
중앙은행이 '최후의 대부자'로서 자금을 공급하고 은행부실이 신속히 처리되면서 2009년 중반경부터 서서히 자금이 돌기 시작했다. 세계경제도 활기를 되찾고 회복궤도에 들어섰다.
하지만 사라지는 듯 했던 신용경색의 망령이 유럽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남유럽국가의 재정위기다.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는 무위험자산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남유럽국가의 재정상황이 워낙 취약하다 보니 국채가 부도가 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퍼졌다.
위험군으로 분류되는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세 나라가 발행한 국채는 각각 4,270억달러, 2,260억달러, 8,480억달러에 이른다. 이것을 세계의 유수은행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데 유럽계 은행의 보유비중이 70~80%에 이른다. 더군다나 리먼 사태의 충격으로 유럽계 은행들은 아직도 2,500억달러의 부실을 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안전자산이라고 생각했던 남유럽 국가의 국채가 부실화된다면 그 은행들은 생존 자체가 불투명하다. 이러니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더 큰 문제는 도대체 어떤 은행이 위험한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옥석을 가리려면 금융당국이 철저한 분석(스트레스 테스트)해야 하는데, 유럽국가들은 이를 꺼리고 있다.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큰 은행이면서 건전한 것으로 알려진 BBVA조차도 최근 자금줄이 막혔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신용경색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가는 몇 가지 지표로 확인할 수 있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은행간 돈을 빌려줄 때 적용되는 리보(LIBOR) 금리는 최근 몇 주 사이에 두 배로 뛰었다. 유럽은행들은 미국에서 단기어음(CP)을 발행해 많은 자금을 조달하는데 CP금리도 세 배 가까이 급등했다. 대출증가율은 여전히 마이너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기업의 중요 자금줄인 회사채 발행은 급감하고 있다.
안전자산을 찾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은행들은 확보한 현금을 가장 안전한 중앙은행에 맡긴다. 유럽중앙은행(ECB)에 맡길 경우 0.25%의 낮은 금리를 받기 때문에 시장에서 운용하는 것보다 손해지만 그래도 믿을 곳은 중앙은행 뿐이니, 돈은 자꾸 몰린다. 또 미 국채 투자가 급증하면서 한때 4% 부근에 머물던 미 국채 금리가 3%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것도 안전자산 선호와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지금 유럽에선 신용경색이 뚜렷해지고 있음이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관건은 이번 위기가 2008년 리먼 사태 수준의 신용경색으로 번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그럴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리먼 사태는 단기간에 불거져 충격이 크게 나타났으나, 남유럽 문제는 지난해 4분기에 표면화되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시장에 점진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또 리먼 사태를 거치면서 신용경색을 다루는 중앙은행의 노하우가 많이 축적된 것도 시장을 안심시키고 있다.
그러나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유로존의 정치적 리스크, 고위험군 국가의 채무불이행 선언, 동유럽 위기 가능성과 같은 대형 악재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유럽판 신용경색이 '리먼 사태 2.0'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면서도 유럽의 정치 경제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해야 하는 이유이다.
성병묵 한국은행 해외조사실 과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