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과 외환은행의 40여년 공생관계가 파탄 직전이다. 외환은행은 "재무구조가 나빠진 만큼 현대그룹을 재무구조개선약정 대상에 넣을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고, 현대그룹은 이에 맞서 "이럴 바엔 차라리 주거래은행을 바꾸겠다"고 맞서고 있다. 밀어주고 끌어주며 한국의 개발시대를 이끌어 온 양측의 파트너 관계는, 이번 사태가 어떻게 결론 나든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많다.
애증의 40년
둘의 관계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은행에서 분리돼 외국환 전문 국책은행으로 탄생한 외환은행은 한은과 거래하던 현대그룹을 새 파트너로 맞았다.
해외 건설 등 수출주력기업이었던 현대에게 외환은행의 수출입 업무 노하우는 큰 힘이었다. 외환은행 역시 삼성그룹의 주거래은행이었던 한일은행, LGㆍ대우ㆍSK그룹 등 가장 많은 주거래 대기업을 갖고 있던 제일은행 등 대형 시중은행이 주도하는 기업금융 시장에서 현대그룹 덕에 명함을 내밀 수 있었다.
현대 계열사 건물에는 거의 예외없이 외환은행 지점이 들어섰고, 월급을 외환은행 통장으로 받는 그룹 직원들은 역시 외환은행 고객이 됐다. 현대그룹 본사에 자리했던 외환은행 계동지점장은 늘 임원승진 1순위로 꼽혔을 정도다.
금슬 좋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97년 외환위기부터. 현대는 유동성위기와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그룹해체의 아픔을 겪었고, 외환은행 역시 외국계 자본(코메르츠→론스타)을 주인으로 맞아들이면서 영업관행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외환위기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외환은행이 전과는 달리 경직된 태도를 보이면서 자금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관계의 변화?
현재 양측은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외환은행측은 "주력사인 현대상선의 부채비율이 높아진 이상 재무구조개선약정은 피할 수 없으며 모든 대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약정에 현대그룹만 예외일 수는 없다"는 입장. 이에 현대는 "일감이 많아지면 부채비율이 높아지는 해운업(현대상선)의 특성을 전혀 고려치 않은 처사"라고 맞서고 있다.
지금 불거진 갈등은 이처럼 구조조정을 둘러싼 입장차 때문이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이번 갈등은 전통적인 은행-기업의 관계가 달라진 데 따른 부산물이란 해석도 있다.
사실 산업자금이 절대 부족하던 시절 은행은 기업에 확실한 '갑(甲)'의 위치에 있었다. 기업은 늘 은행에 손을 벌려야 했고, 이런 주거래은행을 통해 정부는 기업을 통제했다. 1992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자 정부가 은행을 통해 현대그룹의 자금줄을 끊었던 것은 그 단적인 사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기업은 자금이 풍부하고 자금조달도 대출 보다는 주식ㆍ채권발행에 주로 의존한다. 은행신세를 질 일이 별로 없어진 것이다.
현재 현대그룹은 "외환은행이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을 강행할 경우 빌린 1,600억원을 모두 갚고 다른 업무관계도 청산하겠다"는 입장이다. 과거 같으면 기업의 주거래은행 변경 운운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재무구조개선약정 공방도 공방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지난 40여년 동안 쌓아온 현대와 외환은행의 오랜 신뢰관계가 무너진 것 같다"고 말했다.
결론 어떻게 날까
외환은행은 현대측과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이미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시한을 두 차례 연기한 상태. 은행측은 17일 재무구조평가위원회를 열어 지난 15일로 만료된 현대그룹의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시한을 25일까지 다시 한번 연장해주기로 했다. "당장 여신회수 같은 극단적 조치보다 최대한 협상을 통해 상생할 방안을 찾자는 취지"라고 외환은행 관계자는 설명했다.
하지만 현대측 입장은 여전히 강경하다. 현대 관계자는 "조만간 모든 대출과 거래관계를 청산한 뒤 다른 주거래은행을 맞아 재무구조를 다시 평가 받겠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선 이번 사태가 앞으로 진행될 양측의 물밑 협상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 ▦주거래은행 변경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현대에만 예외를 인정하기 힘든 만큼 결국은 약정체결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현대그룹이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지만 사태가 어떻게 결론 나든 외환은행과의 관계회복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재무구조 개선 약정
주채무계열(금융권 채무가 많은 그룹사)의 재무구조를 채권단이 매년 평가해 불합격한 곳을 대상으로 맺는 약정(MOU). 약정을 맺은 그룹은 재무구조 개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산매각 등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한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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