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강변이 붉게 물들었다. 붉은 티셔츠 차림의 시민들은 28도가 넘는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 손에 태극기를 든 채 여의도 너른들판을 찾았다. 너른들판이 있는 마포대표 남단 한강둔치 일대는 응원의 성지(聖地) 서울광장의 아성에 도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10만명의 시민들이 운집했다.
한국일보 서울시 SBS가 주관하고, SK텔레컴 아디다스가 주최하며, 자생한방병원과 청정원이 후원하는 '여의도 거리응원 한마당, again 2002'에서 시민들은 아르헨티나에 선전하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모두 한 덩어리가 됐다.
너른들판은 도심의 교통 체증과 빌딩 숲의 열기를 피해 탁 트인 강변의 시원함을 만끽하며 12번째 태극 전사로 응원을 펼칠 수 있는 천혜의 장소여서 경기 시작 전부터 시민들로 가득 찼다. 3만8,000㎡(약 1만1,500평) 규모의 강변 잔디광장에 돗자리 등을 깔고 자리잡은 시민들은 500인치 초대형 LCD전광판과 대형 무대를 응시하며 뜨거운 거리응원을 벌였다. 이날 오후 4시께부터 나와 거리응원전에 참여한 이선민(45ㆍ여ㆍ서울 마포구)씨는 "강 바람이 불어 시원한 공간에서 좋은 사람들과 응원을 하니 기분마저 상쾌하다"고 즐거워했다.
너른들판은 경기 3시간 반 전인 오후 5시께부터 식전 행사가 시작됐다. 2009 미스코리아 진 김주리양의 진행으로 응원의 묘미가 배가 됐고, 닥터코어911 스위밍피쉬 등 월드컵 관련 음반을 낸 실력파 인기 밴드가 나와 시민들의 응원 열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여기에 천상의 하모니스트로 불리는 전제덕이 출연해 한강변을 낭만이 흐르는 수변 무대로 만들었다. 또 저녁놀이 질 무렵 펼쳐진 불꽃쇼와 바로 옆 수변 무대인 여의도 플로팅스테이지에서 벌어진 화려한 분수 및 조명쇼도 시민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경기 시작 30분 전 열린 비빔밥 퍼포먼스 행사를 통해 시민들은 깊은 일체감 속에 빠져들었다. 어린이, 일반 시민, 재계 인사들이 대형 주걱을 들고 무려 2,010인분의 비빔밥을 비비는 특별한 행사였다. 직경 3m의 대형 나무 그릇에 엄청난 양의 비빔밥 재료가 모아지자 참가자들은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승리를 만들자는 의미로 정성스레 비빔밥을 비볐다. 이를 지켜본 이효원(25ㆍ여ㆍ대학생)씨는 "월드컵 거리응원을 하면서, 또 비빔밥 퍼포먼스를 보면서 세종시 논란으로, 천안함 사태로 이리저리 찢겨 싸웠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 국민임을 뼛속 깊이 체험했다"고 말했다.
이 퍼포먼스에는 비빔밥에 들어가는 고추장처럼 아르헨티나 선수들에게 한국인의 매운맛을 보여 주라는 시민들의 염원도 담겨 있었다. 고사리 콩나물 쌀 등 재료를 이용, '가자 16강!'이란 응원 문구를 토핑한 것도 그런 이유다.
퍼포먼스 직후 대형전광판에 박지성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위가 술렁였다. 박지성이 "자, 응원 전 가벼운 체조로 몸을 풀까요"라며 응원체조를 직접 한 동작 한 동작을 해 보이자 시민들도 모두 따라 했다. 이 동영상은 이날 거리응원전을 위해 영국 맨체스터에서 촬영해 온 것이다.
어어 응원단장과 치어리더 주도로 태극 전사의 승리를 염원하는 거리응원전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응원 열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빨간 티셔츠를 입고서 응원한 박기영(65ㆍ서울 양천구)씨는 "젊은 사람과 한 뜻으로 응원하니 정말 좋다"고 했고, 이지아(21ㆍ여ㆍ서울 영등포구)씨는 "4년 전 독일 월드컵을 TV로 보며 응원했던 친구들이 이제 대학생이 돼 함께 거리응원을 펼치러 오니 너무나 뜻 깊다"고 말했다.
마침내 8시30분께 경기가 시작되자 한강변에 모인 시민들은 잠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입에서는 '대~한민국' 함성이, 손에서는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16강 진출의 분수령이 될 경기라 시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성적으로 응원전을 펼쳤다. 선제골을 내 준 뒤 전반전 45분께 이청용의 첫 골이 터지자 시민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결국 대패했지만 경기가 끝난 뒤에는 수백 명이 시민들은 끝까지 무대 주위에 남아 열심히 싸운 태극 전사들을 격려했다.
이날 많은 사람들은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를 직접 치워 성숙한 시민 의식을 보여 줬다. 김선호(18)군은 "깨끗한 한강변에 쓰레기를 버릴 수 없어 미리 쓰레기 봉지를 준비해 왔다"며 "다음 경기는 새벽에 열리지만 꼭 한국이 16강에 진출할 수 있도록 여의도 한강변에서 다시 응원전을 펼치겠다"고 말했다.
박관규기자 ace@hk.co.kr
김현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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