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말기인 1979년 여름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방한한 카터 미 대통령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앞뒤 가리지 않는 특유의 직설을 쏟아냈다. "미국이 독재정권을 방치하고 있다. 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타도하지 않느냐?" YS는 얼마 뒤 뉴욕타임스 특파원에게도 같은 말을 해 크게 보도됐다.
유신정부는 "사대주의적 매국행동"으로 격렬하게 비난했다. 강압통치에 염증을 느끼던 많은 지식인, 국민도 YS의 이 언행에는 불편함을 드러냈다. 집안이 아무리 콩가루여도 담장 너머로 소리가 나가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YS는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다. 10ㆍ26 사건이 터지기 3주 전이었다.
시민단체들의 천민저항주의
진보성향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유엔 안보리에 천안함 조사결과를 문제 삼는 서한을 보낸 데 대해 보수진영의 비난이 격렬하다. YS 발언 때와 같은 이유다. 제 편이면 끔찍이 감싸는 진보진영 일부에서도 경솔하다는 비판이 나올 만큼 참여연대의 행태는 정서적으로 적지 않게 불편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냉정히 보면 전혀 납득하지 못할 건 아니다. 그들 말대로 세계의 많은 NGO들이 국제적 쟁점들에 대해 다양한 형태로 입장과 주장을 전달하는 건 맞다. 정부 발표에 비판적인 NGO의 존재는 당연하고, 또 안보리가 이번 문제를 한반도의 평화라는 큰 관점에서 다뤄주길 바란다는 의견에도 동의할 수 있다.
나아가 별 대표성도 없는 일개 시민단체의 서한 한 통이 국가 이미지나 큰 흐름에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안보리 대표들이 팩스로 받은 서한 한 장에 "한국은 웃기는 나라"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을 리도 없다.
정작 문제는 서한 발송 자체가 아니라 그 내용이다. 그들이 조사결과를 의심하는 근거로 든 10여 가지 항목 대부분은 이미 수없이 설명되고 해명된 것들이다. 전혀 '합리적 정리'라곤 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상황 진전에 관계없이 매번 원점에서 같은 의혹을 고장 난 테이프 돌리듯 반복해 제기해대는 행태가 안타까운 것이다. 문건에는 어떤 의혹 해소 노력의 흔적도 없다. 정말 국민적 합의를 통해 국제적 설득력을 강화하는 것이 목표라면 왜 자신들은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가?
답답한 김에 일반 대학생들에게까지 민감한 현장을 공개하고 설명하는 군이 참여연대쯤 되는 시민단체의 실사 요구나 문의를 받았다면 도리어 반색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민단체도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다들 의혹 제기와 확산을 통한 정치ㆍ사회적 효과에만 관심이 있을 뿐, 애당초 진실 규명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쯤에서 우리 시민단체의 정체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시민단체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70~80년대 운동권 조직들은 권위주의의 질식할 듯한 사회에서 숨통을 틔우는 환기구 역할을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시민단체는 정부의 관심이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틈을 메우는 생활환경 밀착형으로 바뀌어야 했다. 서구의 일반적 시민단체들이 이런 형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간판을 내걸든 이념과 정치성을 강화하는 왜곡된 방향으로 변모해왔다. 그러므로 시민단체 대부분은 정치단체다. 우리의 사회경제구조를 흔히 '천민자본주의'로 비판할진대, 이들 시민단체의 정체성은 '천민 저항주의'로도 부를 만한 것이다.
그래도 수사ㆍ처벌은 부적절
그렇더라도 참여연대 서한을 수사하겠다는 것은 또 다른 망발이다. 사안이 어떻든 의사표현을 자꾸 법으로 규율하려 드는 것은 쓸데없는 갈등을 키우는 무모한 짓이다. 더욱이 얼핏 훑어만 봐도 적용할 법 조항조차 마땅치 않다. 비록 의사표현 행위가 지극히 못 마땅하고 국가사회에 당장 손해를 끼치는 일이라 해도, 더 큰 이익을 위해 그만한 사회적 비용은 기꺼이 감당해야 하는 게 또한 민주주의 정치체제다.
제발 때마다 흥분하지 말고 우리가 처한 국가사회의 현실을 합리적 이성의 눈으로 보고 신중하게 행동하기를 거듭 당부한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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