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는 50년대 출생 전후(戰後)세대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였습니다. 50년대 출생 전후 세대들은 해방 이후 서구식 교육제도 속에서 성장한 최초의 세대들입니다. 1960년대 한국 근대화 과정이 고스란히 이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습니다.
이들은 새마을 운동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고,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 는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1960년대 물밀듯 밀고 들어온 서구의 문화사조를 한꺼번에 흡수하는 예술적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상징주의와 영미의 모더니즘, 독일의 표현주의 문예사조를 동시에 습득합니다. 그들은 전시대적 식민치하의 잔재도 없고, 전쟁에 대한 상처도 별로 없습니다. 그들은 전쟁통에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포대기에 싸여 있었으므로 전쟁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삶은 아직 잔존하고 있는 전통의 뿌리에 닿아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황토길이나 자갈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고, 할머니가 풀어 내는 이야기 보따리를 들으며 성장했습니다. 감나무를 타고 탱자나무 가시에 찔리고 흙투성이가 되어 뒹굴었지요. 심심찮게 논두렁을 가로질러 가는 꽃상여를 보았고, 혼례가 있는 날에는 마을 전체가 축제의 마당이 되는 과정에 어린 불청객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7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전후세대의 인식은 제3세계적 후진국의 상황을 읽어내기 시작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학생 데모에 참여합니다. 한일협정 반대 데모로 기억하는데 가로막는 체육선생님을 밀치고 교정으로 달려 간 기억이 아직도 죄의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무섭고 강인하게 보이던 체육선생님이 울면서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고 외치는 소리가 제 코끝을 시큰하게 했더랬지요. 교정 밖은 검은 방패를 든 경찰들로 가득했습니다. 아, 세상 밖은 저렇게 완강하고 야만적인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제가 다닌 경남고는 학생들 별명이 똥구두였습니다. 미군 가죽 군화를 똥구두라 불렀는데, 입학할 때 군화 한 벌 사면 3학년 졸업할 때까지 신고 다녔습니다. 워낙 발 냄새가 심하게 나서 아예 양말을 신고 다니지 않는 학생들이 '나족회'를 결성했습니다. 그때의 습성 탓인지 저는 지금까지 양말을 신고 다니지 않습니다. 맨발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미군이 써다 버린 군화를 신고 다니면서 반일 반미를 외쳤던 맨발의 청춘들이었지요.
저는 학교 공부는 등한시하면서 제 십대 말을 제 멋대로 탕진했습니다. 토요회란 이름의 문예반에서 시를 끄적거렸고, 교내 합창반에서는 몇 안 되는 퍼스트 테너였습니다. 흥사단 산하의 도산사상연구회 단우였고, 주말이면 원불교 교당에 가서 지냈습니다. 중앙일보에서 주최하는 독서 경연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하여 3권을 달달 외웠습니다. 그때의 독서 체험이 지금까지 제 의식의 기저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놀랍니다. 제 상상력의 젖줄은 에서 나오고, 제가 꿈꾸는 연극은 결국 플라톤의 이상주의에 닿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본격화된 유신시대는 젊은 그들에게 오히려 비판적 지식인의 길을 걷게 합니다.
60년대 4.19 혁명에서 점화된 반독재 자유의 기치는 70년대에 이르러 민주주의와 평등의 기치로 발전됩니다. 반미 반일 분단 상황 극복을 향한 민족주의의 기세와 민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마당극운동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에다 피스카토르의 정치극 브레히트의 서사극 등이 금서 목록의 장벽을 뚫고 들어와 비밀리에 복사됩니다. 그들은 그들이 배운 서구의 이성주의와 인문학적 시각으로 제3세계적 가난과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 나간 것이지요.
그러나 1950년대 출생 전후세대의 의식이 사회 전면으로 등장한 시기는 80년대라고 생각합니다. 30대에 접어든 그들은 유신시대의 종언과 함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거대담론과 문화양식을 창출해 냅니다. 저는 80년대의 이 새로운 문화현상을 '해체와 실천' 이란 담론으로 해석해 내었습니다. 바야흐로 구시대적 관념론과 감상주의, 언어 유희에 갇힌 모더니즘이 전후세대에 의해 해체됩니다. 박남철 이성복 최승자 황지우 등 걸출한 전후세대 시인들이 시의 시대를 꽃피웁니다. 민주 민중 민족주의 성향의 문화는 실천이란 제3세계적 프락시스(praxis) 운동과 연결되면서 더욱 현장적이고 제도권외적 문화를 생산해 냅니다. 여기서 노동자 시인 박노해가 등장합니다. 이는 김정환 김사인 등 강철 무지개의 의지를 지닌 시인들이 실천문학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우리의 문화를 더 낮은 곳으로 끌어내린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시인 이성복은 이러한 80년대의 문화현상을 '저공비행'이란 시어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전후세대의 80년대 문화운동은 음악 무용 연극 영화 등으로 확산되면서 80년대 말까지 이어집니다. 여기까지입니다.
그 이후 한국의 정치사회적 흐름과 문화양상에 대해서 저는 별로 논할 게 없습니다. 있다면 거의 불쾌하거나 씁쓸한 것들이지요. 예를 들어, 1986년 삼당합당은 단순히 정치적 사건에 제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우리사회에서 신념체계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정치사회적 지표로서의 이데올로기와 거대담론이 상실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각하는 각하로 존재하고, 선생은 선생으로 존재하는 시대가 건강한 사회라고 믿었습니다. 서로 다른 신념체계와 당파성이 사라지고, 현실적 기득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이합집산하는 시대야말로 얼마나 불행하고 혼돈된 세상인가요. 믿고 따를 수 있는 신념체계도 거대담론도 사라져 버리니까 뒤따르는 것은 개인주의와 천박한 대중제일주의 성향일 수 밖에 없겠지요, 이런 개판의 시대에는 깽판으로 응수하는 것이 상책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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