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요즘 유행하는 '스펙'으로만 볼 때, 금융권에서 어윤대씨만한 인물은 흔치 않다. 금융통화운영위원 국제금융센터소장 등을 거친 국제통 금융전문가, 대학에 '경영' 개념을 끌어들인 첫 CEO형 총장, 여기에 현 국가브랜드위원장을 포함한 각종 정부 자문기구 요직까지. 경륜과 이력의 잣대로 따진다면, 그가 15일 KB금융지주회장으로 내정된 것은 크게 잘못된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낙점을 보는 은행권의 시선이 냉소적이란 사실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금융자율화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 듯 관치로 뒤범벅이 됐던 KB지주 회장선임파동, 그 8개월에 걸친 반전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 '어윤대 회장'으로 클로즈업 된 것을 '해피 엔딩'으로 보는 이는 많지 않다.
'스펙' 넘치는 그가 이런 평가를 받는 이유는 단 하나, 'MB맨'이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이명박 대통령의 아끼는 대학후배가 아니었다면, 아니 차라리 지난 정권에서 KB회장에 임명됐더라면, 결코 이런 반응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본인은 억울할 것이다. 자격이 모자란다면 모를까, 오히려 넘친다고 생각할 텐데 '낙하산' 취급 당하는 게 심히 불쾌할 것이다. 하지만 정부 지분이 하나도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한 관치의 몸살을 앓았던 민간금융회사 CEO에 대통령 측근인사가 임명됐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개운한 선임은 될 수 없다. 더구나 은행 주변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어윤대 내정설'이 파다했던 터가 아닌가.
어쨌든 결말은 났다. 남은 것은 어윤대 회장이 이 거대 금융회사를 어떻게 끌고 가느냐에 있다. 과연 새 선장을 맞은 KB는 긴 표류를 끝내고, 순항을 하게 될까.
여기엔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본다. 하나는 '어윤대 프리미엄.'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부와 척(隻)을 지어서 잘 나간 기업은 없다. CEO가 집권세력과 껄끄러운 관계라면 문제가 되어도, 친하다는 것 자체는 나쁠 게 없다. 만약 어윤대 회장이 '실세의 힘'을 바탕으로 무너진 리더십을 복원하고, 장차 '메가뱅크(우리금융 인수)'까지 성사시킨다면, KB는 'CEO 효과'를 톡톡히 누릴 것이다.
하지만 권력과의 거리에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KB는 정부기구가 아니고, 국책은행도 아니다. 순수 민간금융회사이고, 더구나 외국인 투자자와 글로벌 시장이 지켜보는 국내 간판 금융기관이다. 만약 어윤대 회장이 정부에 대한 보은(報恩)경영에 몰입한다면, 만에 하나 금융과 시장의 논리 아닌 정치와 권력의 생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징후가 조금이라도 발견된다면, 투자자들은 등을 돌릴 것이고 결국 '어윤대 프리미엄'은 순식간에 '어윤대 디스카운트'로 바뀌고 말 것이다. 최악의 경우, 차기 정권에서 부메랑을 맞을 수도 있다.
KB회장이 선임되기까지, 결코 유쾌한 과정은 아니었다. 다시는 반복되어서도 안될 광경들도 너무 많았다. 그 대미를 장식한 어윤대 회장이 과연 프리미엄을 형성해낼지, 아니면 디스카운트를 만들어낼 지, 그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자세에 달려 있다.
이성철 경제부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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