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경이 유차(遺箚)에서 당쟁 조짐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헛말이었는가? 아니다. 실례가 있다. 김개(金鎧)와 기대승(奇大升) 등의 대결을 보면 알 수 있다.
1569년(선조 2) 6월 1일 김개가 사림에게 죄를 얻어 문외출송(門外出送)되었다. 그는 김계휘(金繼輝)의 족인으로 윤원형(尹元衡)과 가까웠다. 그는 특히 선비들이 설치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경연에서 "선비라면 당연히 자기 자신을 단속하고 입으로 남의 잘못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 지금의 선비라는 자들은 자신도 부족한 점이 많으면서 함부로 시비를 논하고 대신을 비난하니, 이런 풍조를 키워서는 안 됩니다" "지금 선비라는 자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함부로 떠들어대고 있는데 그들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기대승은 김개가 노리는 사람이 자기를 비롯해 이탁(李鐸)·박순(朴淳)·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정철(鄭澈) 등이라 했다. 김개는 원래 지식이 없는 사람인데 명종 말년에 영의정 윤원형에게 정사를 위임하라고 해 사림의 배척을 받았다. 김개 뿐 아니었다. 대신 중에 어느 사람은 기대승이 사석에서 영의정은 쫓아내야 하고, 좌의정은 뺨을 처야 한다고 했다고 모함했고, 선비들이 이준경에게 김개를 쫓아내자고 하자 "이 일은 김개의 뜻만은 아닐 것이니, 만약 잘못 건드리면 큰 화를 당할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아도 젊은 선비들을 내쳐야 한다는 것은 대신들의 중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심의겸(沈義謙)이 중재하는 체하며 김개를 변명해 준 것도 혐의를 둘 만하다.
이준경은 대신들과 사림의 불화를 조율하고자 했다. 사림의 과격한 주장과 지나친 결속을 견제하고, 대신들이 세를 모아 사화를 일으키려는 것도 억제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예가 퇴계의 지나친 부상을 우려한 것이다. 1568년(선조 1) 이황이 우찬성으로 서울에 불려 올라오자 축하객이 많이 몰려 영의정인 이준경을 3일 뒤에나 찾아갔다. 이준경이 화를 내면서 매우 나무랐다. 옛날에 조광조가 패거리를 많이 모으다가 기묘사화를 당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황은 병을 이유로 얼른 물러났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해 김개가 "경호(景浩: 이황의 자)가 이번 걸음에 소득이 적지 않았다. 잠깐 서울에 왔다가 1품의 고신(告身)을 손에 넣어 향리(鄕里)의 영화거리가 되었으니 그 얼마나 만족할 일인가?"라고 비아냥거렸다.
김개를 비롯한 대신들이 뭉치려 하자 기대승을 비롯한 사림들이 일제히 반발했다. 선조도 신정을 펴는데 새로운 인재들이 많이 필요했으므로 결국 김개를 쫓아내 사림들의 불만을 무마했다. 김개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그리하여 동서분당은 6년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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