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벼랑끝 전황 속 통영 기습 상륙해 탈환 '해병대 신화창조'
"오랜 가뭄 끝에 맛본 단비였다고나 할까요. 군인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 모두가 연일 북한군에 밀리고 밟히고 쓰러지면서 승리를 간절히 원했으니까요."
정광춘(79ㆍ예비역 상사)옹은 경남 통영상륙작전을 떠올리며 지금도 감격에 벅찬 듯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도 귓전에 적군의 총탄 소리가 들리는 듯 잠시 눈까지 감았다. 그리곤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당시 통영시는 경남 진해시와 부산을 지키기 위한 핵심 길목이었어요. 아군의 심장부를 겨누는 곳이었다고 봐야죠. 그 중요한 곳을 우리 해군과 해병대만의 힘으로 되찾았어요. 이후로는 미군이나 연합군도 절대 우리를 무시하지 못했죠."
정옹은 해병대 창립 멤버다. 해병대 1기라는 긍지를 앉고 청춘을 전선에 바쳤다. 경남 마산시 진동리전투, 통영상륙작전, 강원 도솔산전투, 경기 장단지구전투 등 해병대를 국민의 영웅으로 만든 수많은 전장에 항상 그가 있었다. 6ㆍ25전쟁 60주년의 감회를 묻자 노병은 손사래를 치며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가 싸우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아오릅니다"고 전의를 불태웠다.
동기생 중에 몇 명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사람인 정옹은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1950년 4월 15일)되던 그해 4월 5일 18세의 나이로 자원 입대했다.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추기도 전에 6ㆍ25전쟁이 터져 실전에 투입됐지만 해병대가 백척간두의 대한민국을 지켜 내는 최후의 보루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하루 4㎞씩의 완전 무장 구보, 하루 6, 7회나 이어지는 야간 비상 소집, 강도 높은 얼차려 속에서 다져진 끈끈한 전우애와 일사분란한 팀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적군과 맞닥뜨린 충남 장항전투에서는 상당수 대원들이 탄환의 뇌관을 쳐 폭발하게 하는 공이 조차 없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소총을 들었고 실탄도 1인당 75발밖에 지급받지 못한 상황이었어요. 힘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4시간여 만에 후퇴를 했을 때는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죠."
첫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해병대는 이후 연전연패했다. 이들은 전북 군산시와 전남 목포시로 밀린 데 이어 전북 남원시로 가야 했고, 그리곤 경남 함양ㆍ산청군을 거쳐 마산시까지 패퇴했다.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흐트러짐 없이 대오를 유지하며 전열을 가다듬어 미군과 한국 육군 병사들로부터 '지독한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해병대는 전남 여수시에서 참모장인 김성은(1924~2007)부대장과 합류해 이른바 김성은부대(4개 중대)로 확대 재편성, 대반격을 준비했다. 바로 진동리전투다. 화기중대에 편성돼 소대장 전령(연락병)을 맡은 정옹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중대가 한때 고립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맹렬한 화력을 집중해 적군을 격퇴시켰다.
마산시으로 통하는 보급로를 확보한 김성은부대는 50년 8월 14일 하늘을 찌를듯한 사기로 진해시로 개선했다.
개선 후 평택호에서 초조하게 대기 중이던 부대에 긴급명령이 하달됐다. 경남 거제시 서해안에 상륙해 통영시에서 거제시로 침입하는 적을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제시 쪽 전황이 급박하지 않다는 정찰대 보고를 접한 김성은부대는 작전을 변경해 줄 것을 해군본부에 건의했다. 소규모 병력으로 거제시 일원을 지키기보다는 전 병력을 통영시 장평리에 상륙시킨 다음, 일부 병력을 원문고개로 진출시켜 북한군의 후속을 차단하고 주력 부대로 통영 시내의 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기념비적인 통영상륙작전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완성됐다.
변경된 작전 수행을 위해 8월 17일 밤 해군은 통영시 해안에 대한 일제 포격을 가하면서 적을 유도하고 김성은부대는 통영시 동쪽으로 기습 상륙해 무혈 상륙에 성공했다. 소련제 중화기로 무장한 적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유일한 공력로인 원문고개 등에서 4~5시간여에 걸친 혈투 끝에 적군을 격퇴시켰고 18, 19일 이틀간 적군을 강하게 밀어붙인 끝에 결국 통영시를 접수했다.
전사자는 적군 469명, 아군 15명. 압도적 승리를 거둔 이 전투에서 정옹도 오른쪽 정강이에 관통상을 입었다. "소대장의 명령을 인근 중대에 전달하기 위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달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적탄이 날아오더니 내 정강이를 뚫고 지나갔어요. 순간 정신을 잃었는데 나중에 깨어 보니 주위에 적군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어요. 아픔도 잊은 채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아군 진영으로 왔어요."
진해시 해군병원으로 후송돼 2차례 수술을 받으며 7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당시의 상흔은 영광의 상처로 뚜렷이 남아 있다.
"총을 맞은 오른쪽 다리는 물론, 왼쪽 다리까지 쑤시고 허리도 결리는 느끼는 고질병이 됐지만 자랑스런 해병대 1기의 훈장으로 여깁니다. 이렇게 살아 남은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죠."
20일 원문고개에 주둔 중인 아군을 향해 경남 고성군 쪽에서 해안선을 타고 온 적군이 기습한 적도 있지만 김성은부대는 적을 무난히 격퇴시키며 9월 20일까지 원문고개를 지켜냈다.
그는 퇴원 후 51년 6월에는 도솔산전투에 투입됐으나 다친 다리가 재발해 강원 원주시를 거쳐 부산으로 후송됐다. 이후 진해시 해병대 신병훈련소 조교로 갔다가 해병대전차중대 창설 맴버로 복귀해 전차대대 창설 주역이라는 영예까지 않고 58년 5월 28일 피땀으로 얼룩진 군복을 벗었다.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그는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회원으로, 해병전우회 회원으로 왕성한 예비역 활동을 하고 있다.
"해병대 군번(9100010)만 한번 외도 용기가 불끈 샘솟습니다." 그에게는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해병 혼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 美軍도움 없이 우리 海兵 단독 첫 성공 작전
미국 일간지 뉴욕헤럴드트리뷴의 마가렛 히긴스 기자는 1950년 8월 23일자 기사에서 경남 통영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한국의 해병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6ㆍ25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51년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세계적 전쟁 전문기자의 눈에도 해병대의 활약상은 신출귀몰 그 자체였던 것이다. 50년 8월 21일자 뉴욕타임즈와 8월 22일자 워싱턴포스트도 당시 전황을 소개하며 "한국 해병이 100여명의 공산군을 포로로 잡았다. 한국군이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하며 북한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는 내용의 승전보를 본국에 타전했다.
미국인들의 한국 해병대에 대한 경이적 시선은 지금도 변함없다. 미 해병대가 발행하는 월간 해병대(Leatherneck Magazine)는 2004년 1월호 '무적 해병'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한국 해병대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며 해병대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6ㆍ25전쟁 중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해병대는 한국 국민들에게 영웅으로 등장했다"고 치켜세웠다.
통영상륙작전은 한국 해군과 해병대가 미군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성공한 최초의 작전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50년 8월에 접어들면서 낙동강을 중심으로 북한군과 연합군이 대치한 가운데 북한군 7사단 병력 600여명이 부산의 측면인 경남 통영시를 장악했다. 전선에 병력을 집중하다가 허를 찔린 것이다. 적군이 통영시에서 동쪽의 좁은 해협인 견내량을 건너면 바로 거제시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 경우 경남 마산항과 진해항이 적의 포 사정권에 들어가고 반격의 교두보인 부산도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낙동강전선까지 후퇴만 거듭하던 아군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전쟁과 무더위에 지쳐 가던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 줬고, 해병대가 국민에게 널리 사랑받는 군대로 확실히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다.
창원=이동렬기자 dylee@hk.co.kr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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