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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두려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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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두려움에 대하여

입력
2010.06.1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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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파 병원 신세를 졌다. 큰 병은 아니지만 수술을 받고 누워 있으니 마음이 불안하다. 회복이 잘 될까, 후유증은 없을까, 혈압은 왜 떨어지며 식은땀은 왜 날까. 몸이 조금만 이상해도 뭐가 잘못 됐나 싶어 겁이 난다. 모르면 두려운 법.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오장육부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의학을 모르는 나는 그저 걱정만 는다.

그런 판에 누가 틀어놨는지, 뉴스 채널에 맞춰진 TV에선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고 야단이다. 다인용 병실에서 내 맘대로 채널을 돌릴 수도 없고, 속수무책으로 뉴스를 듣고 있자니 몸 안팎이 다 괴롭고 두렵기만 하다. 이러다 몸도 낫기 전에 피난길에 오르는 것 아니냐고 우는 소리를 하니까 집 식구가 걱정도 팔자라고 타박을 한다. 내가 겁쟁이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겁쟁이인 것이 꼭 부끄러운 일만은 아니다.

물론 두려움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근심을 부추긴다. 역사상 유명한 독재자들이 하나같이 공포정치를 편 것은 그래서다. 공포를 내세워 겁에 질린 백성을 좌지우지하기 위함이었던 것. 하지만 이는 또 한편으로 독재자 자신이 공포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었음을 반증한다. 속을 알 수 없는 백성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수록 그들의 폭압은 도를 더했고, 공포는 공포를 낳으면서 온 세상을 공포의 아비규환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몽테뉴의 말처럼, 두려움은 또한 커다란 용기를 낳는 궁극의 힘이기도 하다. 때론 두려움에 대한 공포 때문에 두려움에 맞서고, 두려움을 알기에 미리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사람이니 말이다. 개똥도 약이 되듯이 두려움도 길이 된다. 정약용은 에서 을 인용해 말하기를 "벼슬살이의 요체는 '두려워할 외(畏)' 한 자뿐이다. 의(義)를 두려워하고 법을 두려워하며 백성을 두려워하여 마음에 늘 두려움을 간직하면 허물을 적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벼슬아치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도 의를 두려워하고 법을 두려워하면 허물을 줄일 수 있을 터인데 왜 유독 벼슬살이의 요체를 두려움이라 했을까? 벼슬아치는 크든 작든 권력을 갖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 권력이 두려움을 잊게 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을 부끄럽게 여기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권력이 두려움을 모를 때,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은 세상에 없다.

얼마 전 대통령은 일련의 대북 강경조치를 내놓으면서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전쟁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밝혔다. 참으로 당당한 말씀이지만 듣기에 따라선 참으로 두려운 말이기도 하다. 60년 전 이 땅을 피로 물들인 전쟁이 증언하듯이, 전쟁이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비극이며 두려워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6․2 지방선거가 여당의 참패로 끝났다. 뜻밖의 결과에, 여당은 물론 야당에서도 국민의 뜻이 무겁고 무섭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입을 모은다. 지금 그 마음을 기억하여 앞으로 두고두고 마음에 두려움을 간직한다면 허물을 줄일 수 있을 터이니, 정치권에게나 국민에게나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두려움을 부끄럽게만 여기고 잊기에 급급하다면 언제든 지금보다 더 큰 두려움을 부를 수 있다. 부디 작은 권력이라도 가진 벼슬아치라면 두려움을 길잡이 삼아 스스로의 허물을 덜어야 할 것이다. 국민은 두려움을 모르는 벼슬아치가 아니라, 두려움을 잊지 않는 벼슬아치를 존경하며 어렵게 여기니 말이다.

김이경 소설가·독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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