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중세적 규범에 대한 찬반 논란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것은 17세기였다. 당대 대표적 문인 중 한 사람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92)은 을 써서, 비판지성으로 새로운 인문정신을 가늠했다. 병자호란에 강화에서 순절한 김익겸(金益謙)의 유복자로 태어나 유학자로 출세한 서포는 임ㆍ병 양란 뒷시대의 허학(虛學)을 비판하면서, 본지풍광(本地風光)과 같은 불교용어를 이끌어 새로운 인문(人文)의 질서를 모색하였다. 유학자인 그가 이런 사상적 변화에 이른 것은 37살, 당쟁에 휩쓸려 유배생활에 내몰리면서부터의 일이다. '본지풍광'은 선불교 용어다.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성품을 찾아 스스로의 본바탕(本地)을 알면, 저절로 흘러 넘치는 지혜(風光)로 부처님의 어진 마음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금강산을 보기로 들어, 정작 산에는 가보지도 않고 그림이나 보고 책이나 뒤지면서 금강산을 말하는 그런 학문을 권리풍광(卷裡風光) 지상면목(紙上面目)이라고 하여, 거짓 공부로 비판했다.
김만중이 이런 거짓 풍조와는 달리 본지풍광, 곧 '참'에 가까웠던 사람으로 서경덕(徐敬德)과 장유(張維) 두 사람을 꼽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서경덕이 기일원론(氣一元論)으로 지양(止揚)하려 한 주자학의 체계를 장유는 양명학을 받아들여 주자학 밖에서 부정하는 유학의 위기에 대처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선의 건국 이념인 주자학이 뿌리부터 흔들린 것은 임ㆍ병 양란 이후에 더욱 두드러졌고, 불교나 양명학과 같은 이단적 사상에서 비판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은 이런 시대변혁의 단적인 보기였다. 김만중이 이 두 선배 학자를 지명하며 불교 논리로 유학의 거짓을 비판한 뜻은 이런 악착스러운 구속 속에서는 실심(實心)으로 향학(向學)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 때문이었다. 서포는 같은 글에서 문학작품에도 본지풍광이 있으며, 이렇게 거짓이 없고 참된 말로 된 문학이라면 모두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통할 수 있다고 하여, 민중의 말과 국어문학을 또한 중시했다.
이렇게 17~18세기에 발흥한 실심실학(實心實學)은 '참' 학문 운동이며, 실학의 본바탕이 실심에 있었고, 이것이 조선 실학의 제일 개념이다. '실학'은 17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약 200년간 조선에서 일어나 꽃핀 학문으로, 실학을 일으키고 발전시켜 온 나라는 조선이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제 나라의 학술사상사를 인식하는데 쓰지 않았던 개념이다. 그러기에 실학을 근대 학문으로 체계 세운 정인보(鄭寅普) 선생도 실학을 실심의 학문으로 정의했다.
실학이 실용(實用)의 학문이란 전제에서 동아시아 근대화에 이바지하였다는 평가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경제를 위해서 온 나라 강(江)을 파헤치는 것과 같은 실용주의는 실학이 아니다. 실학은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고 지속 가능한 생명의 문명을 만들어 갈 학문, 학문과 삶이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어야 할 참 학문운동이다. 함석헌 선생이 에선 한 말로 결론을 삼을 만하다. "참은 맞섬(直面)이다. 하나만 아는 일이다.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하는 일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