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전 11시 25분. 전화 수화기에 실려 온 이오른(30)씨의 목소리는 잠에서 덜 깬 듯 끄무레했다. "새벽 6시 넘어서야 누웠는데 흥분돼서 그랬는지 잠이 잘 안 오더군요." 밤새 선거 개표 방송을 지켜본 거였다. 그는 올 1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123일간 매일 저녁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구내에서 '선거 반드시 참여합시다!'라 쓴 선거독려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여왔다.(한국일보 2월6일자)
-피켓시위를 한 건 며칠쯤 되나.
"저와 뜻이 맞는 친구들이 절반 가까이 대신 해줬어요. 그니까 제가 한 건 70일 남짓 될 겁니다. 대신 5월 둘째 주쯤 직장을 옮기면서 출근 시간이 좀 늦춰졌어요. 그래서 오전 9시부터 집에서 가까운 건국대 사거리 횡단보도에서도 1시간 정도씩 피켓을 들었어요. 저녁에는 을지로로 오고요."
-이번 선거 어떻게 보셨나.
"투표율이 역대 지방선거 가운데 2위라잖아요.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보람을 느낍니다. 그 변화의 동력에 제 힘도 더해진 것 같아 뿌듯하고 기뻐요. 희망을 본 거죠. 노력하면 달라지고, 더 노력하면 더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요."
-어제(선거일)는 뭐하셨나.
"오후 2시 30분쯤 주소지에 가서 투표하고, 그 전후론 투표 종료시간 전까지 휴대폰으로 문자도 보내고, 트위터도 하고, 통화도 했어요. 투표 독려 캠페인이죠. 약 200통 정도는 한 것 같아요. 그리곤 내내 TV 앞에서…."
-그런 걸 생활정치라고 하는 건가.
"그렇죠. 저는 우리 정치와 행정이 시민에게 희망과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것은 직업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시민들이 무관심해서, 생활정치가 사라져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주인이 뒷짐 쥐고 먼산만 바라보고 있으니 자기네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거죠."
그는 투표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면서도 그 참여의 열정이 일상 생활에서도 권력 비판과감시의 형태로 상시적으로 표출돼야 한다고, 그것이 건강한 생활정치라고 말했다. 생활정치인인 그의 목소리는 유권자 앞에 나선 정치인의 목소리처럼 생기 있게 달라져 있었다.
-무관심이라….(그건 자성의 푸념 같은 것이었으나, 그는 그것을 질문으로 여긴 듯했다.)
"피켓 시위를 할 때 전 아주 높이 들어요. 그러면 팔은 더 아프지만 멀리서도 보이게 하려는 거죠. 그렇게 해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백 명에 한 명 될까 말까 해요."그의 말처럼 피켓을 높이 들면 자연스레 얼굴을 가릴 수 있다. 그럼으로써 무관심한, 더러는 냉담하기까지 한 뭇 시선들을 그의 의지가 감당하기 힘들어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는 "그건 아닙니다"라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집에서도 먼데 왜 을지로입구였나. 신촌도 있고, 강남도 있는데.
"상징적인 곳이라 여겼어요. 시청과도 가깝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명동 입구이기도 하잖아요. 생활정치의 촛불이 하나쯤은 이 도심에 꺼지지 않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젠 끝났는데.
"당분간은 새 직장 일에 좀 더 신경을 쓸 생각입니다. 그런 뒤에 또 제가 할 일을 찾아 현장으로 나가야지요."
10여 분 동안 그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의 편에서 승리, 심판, 제동 등의 단어들을 자주 언급했지만, 기사에서는 빼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바람 풍'이라 해도 '바담 풍'이라 쓰셔도 돼요. 그만해도 독자들은 다 알아들을 겁니다. 그게 바로 생활정치의 힘이죠."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