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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18) 궁궐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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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18) 궁궐의 수난

입력
2010.05.31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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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조선 궁궐을 '놀이터'로 만들어… 왕실의 위엄 짓밟아

서울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경복궁 안으로 들어서면 대형 걸개그림이 걸린 덧집 안에서 광화문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현재 지붕기와를 올리고 단청을 칠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며, 앞으로 여장과 기단, 월대 등의 부대공사를 남겨두고 있다. 오는 8월말이나 9월초면 1926년 일제에 의해 경복궁 동쪽으로 이전된 지 80여 년 만에, 조선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의 모습대로 광화문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600년 수도 서울의 얼굴인 조선 궁궐. 경복궁만이 아니라 창경궁, 덕수궁 등 모든 궁궐이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겪은 수난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고색창연했던 숱한 전각이 철거되고 일본식 건물이 들어서,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던 공간은 박람회장과 놀이공원으로까지 전락했다.

조선 궁궐 가운데 가장 먼저 일제로부터 모욕을 당한 곳은 창경궁이었다. 1907년 즉위한 순종은 고종이 머무르던 경운궁을 떠나 창덕궁을 새로운 거처로 삼았다. 다음해인 1908년 일제는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창경궁의 선인문 안에 각종 짐승과 새 등을 넣은 동물원을 설치했다. 그 이듬해에는 식물원이 설치된데 이어, 일반에 개방됐다. 1911년에는 박물관이 설치됐고, 이름조차 창경궁(昌慶宮)에서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됐다. 1912년에는 일본의 국화인 벚꽃 수천 그루가 심어졌다. 지금도 창경궁 동쪽에 남아 있는 대온실은 유원지로 전락했던 옛 창경원의 흔적이다.

지엄한 궁궐에서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놀이터로 바뀐 창경원은 출발부터 인기를 끌었다. '봄에는 유람객이 삼사천명 사이를 넘나들며, 일요 대제일 등은 매 육천 내지 칠천명, 드물게는 구천명에 이르는 날도 있다'는 동물원 주임 오카다 노부토시의 1911년 기록은 초창기의 풍경을 전해준다.

창경원 동ㆍ식물원과 박물관 건립은 당시 궁내부 차관이던 일본인 코미야 미호마츠(小宮三保松)가 우울하고 쓸쓸하게 지내던 순종을 위안하기 위해 제안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단지 그 때문이었을까.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들어선 일본 메이지 정부가 도쿠가와 막부가 신성시했던 도쿄 칸에이지(寬永寺) 터에서 박람회를 열고 박물관과 동물원을 건립해 우에노(上野) 공원으로 바꿔버린 전례를 그대로 조선에 적용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칸에이지는 도쿠가와 가문의 안녕을 빌던 보리사(菩提寺)로 몇몇 쇼군(將軍)의 묘와 사당이 있던 곳이었으나, 메이지 신정부로 정권이 넘어간 후 도쿄국립박물관, 국립서양미술관, 우에노동물원 등이 들어섰던 것이다.

당시 메이지 정부의 총리는 후에 조선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게 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이토는 일본에서 궁내성 설치와 황실재산 설정 등을 추진한 장본인이었다. 우동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는 "이토는 조선에 와서도 일본에서 했던 것처럼 궁내부 설치 등을 통해 조선 왕실을 형해화하고 창경궁을 우에노 공원처럼 놀이터로 만들어 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제는 덕수궁도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덕수궁은 아관파천 후 고종이 환궁해 쓰러져가는 나라를 추스르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할 당시 경운궁이라는 이름의 정궁이었다.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고 나서 덕수궁으로 바뀌어 불렸다. 구한말의 역사가 누적된 덕수궁은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궁역을 그대로 유지했으나, 그 이후 곳곳이 잘려나가고 건물이 철거돼 궁궐로서의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궁궐의 서쪽 선원전 터에는 도로가 뚫렸다. 지금의 미국대사관저와의 사잇길이다. 1922년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나간 엄비의 혼전을 헐고 옛 경기여고 교사가 지어졌다. 이듬해에는 그 맞은편에 지금의 덕수초등학교 교사가 지어졌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대한제국 궁내부를 계승한 이왕직(李王職)은 일본 황실의 업무를 관장하는 궁내부의 직속기관이 돼버렸다. 이왕직은 1931년 덕수궁 부지 2만여평 가운데 1만평을 경성의 '중앙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듬해부터 많은 전각이 철거됐고, 석조전은 1933년부터 미술관으로 바뀌어 1943년까지 일본 미술품만 전시됐다.

조선의 개국과 함께 법궁으로 궁궐 가운데 으뜸이었던 경복궁은 박람회장이 돼버렸다.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간 열린 일제의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를 위해 각종 진열관이 세워지면서 정전과 편전, 침전 일곽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전각이 철거됐다.

산업 발전을 명분으로 내건 박람회 개막식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렸다.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오만방자하게 조선 임금의 자리였던 근정전 용상에 앉아 경과보고와 개회사를 했다.

공진회가 끝나고 조선총독부 청?건립 공사가 시작됐고, 1926년 3만여평의 부지에 식민지배권력의 상징인 총독부 청사가 완공돼 경복궁을 압도했다. 일제는 이후 기차 운임의 30%, 증기선 운임의 60%까지 할인해주면서 조선인들의 박람회 관람을 유도, 1940년까지 네 차례의 박람회에 373만여명을 구경시켰다. 경복궁마저 일반 대중의 관람 대상으로 바뀌어버렸던 것이다.

1926년 4월 순종이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궁궐은 공궐(空闕)이 되어 일제의 마음대로 훼손되어갔다. 궁궐의 수난은 조선의 오백년 역사가 사라지는 과정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최대의 행락지였고 해방 후에도 유원지로, 밤벚꽃놀이의 명소로 기억되고 있는 창경원은 복원공사가 이뤄져 1983년 12월, 창경궁으로 환원됐다. 경복궁을 가로막고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는 1995년 철거됐고, 20년 동안 진행된 1차 경복궁 장기복원계획이 올해로 마무리된다. 덕수궁에서는 석조전의 일제 때 훼손된 부분을 바로잡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조선 궁궐들이 옛 모습을 되찾으려면 아직도 많은 손길이 가야 하지만, 지금 궁궐을 찾는 사람들의 눈길은 일제강점기 당시와 다르다. 망국을 한탄하고 식민지배권력을 두려워하며 신문물을 선망하던 눈길은 이제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되새긴다. 궁중조회인 상참의, 왕비 간택 의례, 창덕궁 달빛기행 등 궁궐에서 열리는 여러 체험행사에 참가자들이 몰린다. 지난해 5대 궁궐을 찾은 내ㆍ외국인은 652만명이 넘었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 "궁궐 근대건축물은 정치권력의 문화적 면모를 과시하기 위한 배경"

석조전, 정관헌, 대온실, 국립민속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이 건축물들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우리 궁궐에 지어졌던 근대건축물 중 현존하는 건축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현존 건축물을 포함하여 19세기말부터 20세기말까지 궁궐에는 전통 한옥과는 구별되는 수많은 근대건축물이 지어졌고, 또 사라졌다.

500여년 동안 형성된 궁궐 체계를 해체하면서, 근대건축물이 들어선 이 기간은 우리 전통 사회체계가 새로운 체계로 대체되는 기간이었다.

그 광범위한 변화 과정을 상징적이며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물리적 실체가 곧 궁궐의 근대건축물이기도 했다. 때문에 근대건축물은 그 건축물이 지어지던 시기의 과정적인 성격과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1900년을 전후하여 지어진 경운궁의 근대건축물은 대부분 대한제국에서 지은 건축물로 황실의 다양한 공적, 사적 행사의 장소였다. 그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한 왕조의 마지막을 증언하는 장소였다.

얼마 후 이 건축물 중 상당수가 영원히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전통세계의 해체와 새로운 세계로의 교체가 본격화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지어진 근대건축물은 경복궁, 창경궁을 비롯하여 여러 소규모 궁에 광범위하게 분포했고 온실, 병원, 주택, 은행, 박물관 등 새롭고 다양한 근대적 기능을 가진 건축물이었다. 이들 건축물은 그 장소와 용도가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새로운 체계를 서둘러 정착시키고 안정시키려는 강렬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중반에는 새로운 변화의 정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이 지어졌다. 경복궁 근정전 앞의 구 조선총독부 청사는 모든 권력과 사회 체계가 철저하게 변화되었고 공고해졌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더 이상의 변화는 없고,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듯 웅장하면서 섬세한 돌 건축의 미학적 특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또한 위치 선정과 물리적 크기라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도 그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1930년대에 지어진 것은 주로 미술관이었다. 궁궐은 이제 정치권력의 문화적 면모를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배경이 되었다. 새로운 사회체계를 드러내기 위한 서두름도, 단순하고 직접적인 힘의 과시도 아니었다. 궁궐은 필요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무대 장치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 후 1990년대까지 궁궐에는 박물관이라는 또 다른 문화시설이 지어졌다. 경복궁에는 두 번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이 지어졌고, 경희궁에는 지자체의 박물관이 들어섰다. 정치권력의 주체는 바뀌었지만 궁궐에 대한 시각은 1930년대와 해방 이후에서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도 이전 시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시각으로 궁궐을 보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송석기 군산대 건축공학과 교수

■ 잊혀진 궁궐터/ 日 '태평로 직선화' 구실로 잘라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65년이 됐지만 조선 궁궐이 입은 상처는 아직도 깊게 남아있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붉은악마의 응원전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끈 것을 비롯, 한국사회에 큰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의 3분의 1가량이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당시 황궁이었던 덕수궁 권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덕수궁은 고종이 황제 등극을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올렸던 환구단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둘 만큼, 지금보다 훨씬 더 동쪽으로 뻗어있었다.

일제는 강제병합 직후부터 덕수궁에 남아있던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1912년에는 태평로를 직선화한다는 구실로 동쪽 궐내각사의 절반가량을 잘라내 버렸다. 해방 후 1968년에는 태평로가 확장되는 바람에 지금의 담장까지로 더 줄어들었다.

지금의 대한문은 1970년 원래의 위치로부터 20m가량 서쪽으로 옮겨진 것이다. 일제가 잘라낸 서쪽 권역을 고려하면 현재의 덕수궁은 대한제국 당시의 크기에 비해 3분의 1가량에 불과하다.

경복궁 뒤 청와대 지역은 고종 당시 북원(北苑)이라 불렸던 경복궁의 후원이었고, 중일각, 오운각 등 여러 전각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남산 왜성대에 있던 총독부 부지가 좁다는 이유로 1926년 경복궁에 총독부 청사를 세운 후 이곳에 총독 관사를 짓는 바람에 경복궁에서 잘려나가고 말았다.

구한 말부터 다른 궁궐의 수리 등을 위해 헐려나가기 시작했던 경희궁은 1910년 일본인 2세를 위한 학교가 설립되면서 대대적으로 철거돼 궁궐의 면모를 상실했다. 해방 후 공립학교로 사용되다 민간기업에 매각됐고, 다시 서울시에 매입돼 2002년 궁궐이 복원됐으나 옛 터를 회복하진 못했다.

창덕궁과 종묘는 원래 담장을 사이에 두고 하나로 이어져 있었으나 1931년 일제가 율곡로를 개설하면서 분리됐다. 서울시는 10월부터 이 구간의 일부를 지하화하는 등 복원계획을 추진 중이지만 옛 모습을 되찾기는 어려운 상태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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