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은현리 들판에 나가 둘러보니 논마다 모심기가 끝났습니다. 농사에 손놓지 못하는 늙은 부모와 소만(小滿) 무렵부터 틈만 나면 찾아와 흘린 착한 자식들의 굵은 땀방울이 있어 잠자던 들판이 다시 생명으로 변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무논에 왜가리처럼 가냘픈 다리로 서있지만 저 모들이 자라 '녹색바다'를 만들고 거대한 '황금화엄'을 만들 것입니다. 이곳에 땅 한 평 가지지 못하고 살고 있지만 생명이 주는 힘에 덩달아 힘이 솟는 새벽입니다. 모를 심는 기계인 이앙기(移秧機)가 있어 모심기가 편해졌다 해도 여름농사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를 찌는 일부터 모심기가 끝날 때까지 쉴 틈이 없습니다. 이앙기가 모판의 모를 척척 심어주고 가지만 빈틈이 있기 마련입니다.농사꾼은 그 빈틈을 절대 놀리지 않습니다. 제 손으로 꼭꼭 다 심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게 농사입니다. 쌀농사는 짓는 것보다 쌀을 사먹는 것이 경제적입니다.
허나 땅을 놀리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 농부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있어 은현리가 은현리답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모가 심어진 논에 절하고 다닙니다. 택시운전을 하며 농사짓는 친구 박 기사의 모내기도 끝났습니다. 사는 일이 힘들다고 투정부린 것에 반성합니다. 지금 논에 나가 보십시오. 세상, 살만한 곳입니다. 아직 건강합니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