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공보 봉투가 배달되었다. 여덟 번을 기표해야 하는 선거답게 소책자가 36개나 들어 있다. 출마자 이름도 대부분 모르던 처지라 주말에 꼼꼼히 읽어 보았다. 이번 선거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라 내 지역을 위해 일할 사람을 뽑는 기회이다. 결국 선택기준은 후보의 역량, 아니면 이념적 성향으로 귀결되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맘에 드는 후보가 있으면 선택은 쉬우나, 역량 있는 사람과 이념 성향이 맘에 드는 사람이 다른 경우는 어려웠다. 어떤 기준으로 한 표의 행방을 결정할 것인가?
후보 역량과 이념 성향을 가늠
먼저 후보자에게 조직관리, 갈등조정, 추진력 등 직무수행에 필요한 역량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경력이나 업적을 보면 대체로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분야에서든 일정한 성취를 이룬 경우에는 역량을 인정할 수 있었다. 관련 분야에서 이를 증명한 경우에는 더욱 믿음이 갔다. 반면 정체불명의 직함만 나열하고 후보가 그간 이룬 일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경우에는 역량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념적 성향도 중요하다. 후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공보의 대부분은 구체적인 공약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약보다는 추구하는 이념적 성향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 이유는 현실성이 없거나 능력 밖의 일을 약속하는 사례도 많기 때문이다. 또한 무상급식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서로 충돌하는 공약은 별로 없고 중시하는 분야가 좀 다를 뿐이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공약에 특허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주민을 위한 좋은 아이디어는 주창자에 관계없이 적극 검토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역량과 지향성 중 어느 쪽을 중시할지는 뽑을 자리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나는 광역단체장과 교육감 선택에는 이념적 성향을 중시할 계획이다. 이들은 큰 배의 선장과 같으므로 노 젓는 역량보다는 방향 감각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광역단체를 운영하는지에 따라 4년 후 모습은 상당히 달라져 있을 것이다.
정당 공천이 있는 광역단체장 후보를 고르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으나 교육감 후보는 정당 표시가 없어 가장 열심히 선거공보를 읽어야 했다. 광역단체장 후보들에 비해 교육감 후보들 간에는 공통 쟁점이 많아 이념적 차이가 더 분명했다. 유권자의 알 권리 차원에서는 교육감이야말로 가장 정당 공천이 필요한 자리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초단체장의 경우에는 이념보다는 역량을 바탕으로 한 표를 행사할 생각이다. 기초단체 운영에는 광역에 비해 단체장의 이념적 성향이 끼어들 여지가 적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기 때문에 단체장의 역량에 따라 그 지자체의 활력과 주민 서비스가 쉽게 달라지는 사례도 많이 보았다.
광역의원, 기초의원, 교육의원의 경우에도 이념 보다 역량을 중시하기로 했다. 이들은 집행기관을 견제하는 심의ㆍ의결 기관의 일원이므로 개인이 가진 이념보다는 역량에 따라 그 성과가 크게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후보 사이의 질적인 차이가 상대적으로 큰 것도 이유이다.
일할 자리 따라 기준 다르게
이런 점에서 비례대표 의원선거도 정당투표 취지는 이해하나 후보경력 소개를 늘릴 필요가 있다. 예컨대 비례대표 서울시의원 선거공보는 여야 할 것 없이 8면 중 1 면에 후보 8~10명의 이력을 몰아서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광역단체장이나 교육감의 경우에는 선거공보에 나타난 이념 성향을 살펴 한 표의 방향을 결정했다. 반면 기초단체장, 광역ㆍ기초의원, 교육의원은 이념보다 후보 개인 역량을 기준으로 한 표를 결정했다. 이를 위해 후보가 지금까지 걸어 온 길, 한 일에 주목하였다. 앞으로 지방선거 후보들은 약속을 늘어놓기보다 경력과 업적 등 자신의 역량을 더 성실하게 설명해 주었으면 한다.
박진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