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금융위기를 겪으며, 과거 언론에 자주 등장하던 BRICs라는 단어가 수모를 겪고 있다. 이코노미스트誌는 BRICs에서 R(러시아)을 빼고, I(인도네시아)를 추가한 ‘BICIs’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러시아의 미래는 그렇게 어두운가? 냉전 시절, 미국과 함께 전 세계를 호령했던 러시아가, 지구 육지의 1/8을 차지하는 세계 최대 국가가, 세계 1위의 자원 부국이 너무 과소평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최근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 주간’ 행사 참석을 위해 3일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5월의 러시아는 문학작품을 통해 상상해왔던 눈 덮인 들판이 아닌, 유라시아 대륙의 빛나는 현대 도시 그 자체였다. 고급 외제차가 넘치는 화려한 조명의 그 공간이 과거 세계 공산주의의 메카였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러시아의 날씨만큼이나 변화무쌍했던 러시아인들의 표정이었다. 특히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무표정함과 싸늘한 분위기는 이번 행사가 과연 순탄할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와 푸쉬킨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한국의 산업 발전사를 이야기할 때 그들의 표정에 담긴 순수함과 진지함은 나로 하여금 달리 생각하게 했다.
흔히 러시아인을 ‘서양인의 얼굴을 가진 동양인’이라고 부른다. 그 만큼 우리와 정서가 통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2008년부터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된 양국 관계는 목전의 우주선 나로호의 2차 발사로 한층 무르익어가고 있다. 러시아가 기초과학기술이 뛰어나다면 한국은 상용화 기술에서 앞선다. 이러한 차이점이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다. 양국은 서로의 강점을 살린 기술협력을 통해 아주 미세한 온도까지도 조정이 가능한 정수기, 임산부도 촬영 가능한 X-ray 기기 등을 속속 만들어 내고 있다.
러시아는 석유ㆍ가스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광활한 시베리아대륙을 보유하고 있다. 에너지에 치우친 산업을 다변화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낙후된 시베리아의 개발을 추진 중이다. 현대자동차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자동차 공장을 건설 중이며, 모스크바 롯데호텔은 다음 달에 개장할 예정이다. 시베리아의 각종 석유,가스 개발에 우리 기업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다.
양국이 상생 협력하기 위해서는 우리 기업들이 러시아의 정책을 간접 지원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발굴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최근 개최된 ‘한-러 경협 확대 포럼’과 ‘플랜트 수주 지원 센터’의 개소는 좋은 인프라로 작용할 것이다.
러시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만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최근 G2로 불리며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는 중국의 1인당 GDP가 러시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약 3,600 달러임을 감안하면, 러시아 국민들의 구매력을 가늠할 수 있다. 모스크바 심장부 크렘린궁 앞마당 마네쥐 전시장에서 개최된 ‘세계일류 한국상품 전시회’에서는 개장 4일 동안 수만 명의 관람객이 운집했다.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거대 소비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러시아의 단면이다.
올해 초 이윤호 초대 지식경제부 장관이 러시아 대사에 부임했다. 실물 경제를 총괄했던 장관의 러시아 파견은 한국 정부의 대러 경협 의지를 상징한다. 그 만큼 전략적 협력 동반자로서 양국 관계가 강화되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러시아의 무한한 잠재력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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