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장명수 칼럼] 본질과 치장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장명수 칼럼] 본질과 치장

입력
2010.05.27 12:18
0 0

내가 다니는 은행은 고객을 위한 서비스에 신경을 많이 쓴다. 고객들이 기다리는 동안 차나 음료를 대접하고, 가끔 떡을 주기도 한다. 행원들이 입구에 서서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며 "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좋은 하루 되십시오" 라고 인사도 한다. 나는 이런 인사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고객이 왕이다"라는 정신교육을 이런 식으로 시키나 보다 짐작하고 있다.

그런데 진짜로 필요한 서비스는 100점이 아니다. 현금 입출금 등을 처리하는 자동화 기계의 잉크가 희미해져서 통장에 찍히는 글씨가 잘 안 보일 정도인데, 한 달이 지나도록 잉크 교체가 안 됐다. 절을 하는 행원, 차를 갖다 주는 행원에게 몇 번이나 그 사실을 알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참다 못해서 나는 화를 냈다.

일 잘하는 것이 진짜 서비스

"이런 불편을 빨리 해결해 주는 것이 진짜 서비스고, 또 반드시 해야 할 업무다. 해야 할 일은 안 하면서 절은 왜 하고, 커피는 왜 주나. 고객들은 절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젊은 행원들은 "담당자한테 말했는데도 안 고쳐졌네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절을 할 때와 똑 같은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미소나 절이나 기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규격품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백화점이 문을 여는 시간에 들어가는 손님들은 도열하듯 늘어선 점원들의 인사를 받아야 한다. 민망할 만큼 요란한 인사다. 그러나 일류 백화점의 서비스도 100점은 아니다. 얼마 전 나의 남편이 생일 선물로 소위 명품 모자를 받았는데, 사이즈가 맞지 않아 바꾸러 갔었다. 남편은 색깔도 다른 것으로 바꾸기를 원했다. 점원은 애교가 철철 넘치는 말투로 현재 그 물건이 없으니 연락을 해 주겠다고 말했다.

얼마 후 전화를 받고 모자를 찾으러 갔더니 색깔은 맞는데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나는 "사이즈도 확인 안하고 전화를 했느냐. 바쁜데 또 오라는 말이냐"고 화를 냈다. 점원은 여전히 애교가 넘치는 말투로 "죄송합니다" 라는 규격품 같은 사과를 쏟아냈다.

언제부터인지 본질보다 치장에 열을 올리는 문화가 뿌리내리고 있다. 허리 굽혀 절을 하고 "좋은 하루 되십시오" 라고 인사하면 서비스 만점인줄 착각하고 있다. 업무를 빈틈없이 처리하는 것이 고객을 위한 최고의 서비스인데, 업무는 구멍이 숭숭 뚫린 채 쓸데없는 겉치레 경쟁을 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고 있는 화장실 치장 경쟁도 마찬가지다. 화장실은 청결하고 편리하면 충분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공공 화장실 중에는 다른 나라에서 견학을 올 만큼 잘 꾸며진 곳들이 많다. 음악과 꽃과 휴식이 있는 아름다운 화장실을 만드는 것은 좋지만, 나는 그 돈으로 열악한 다른 화장실들을 고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공공장소에도 아직 불결한 화장실이 많이 있다. 그 유명한 제주도의 올레 코스에도 깜짝 놀랄 만큼 더러운 화장실이 있었다. 올레 길을 걸으며 감탄을 연발하던 우리 일행은 이동화장실에 다녀 온 후 입을 다물었다. 이동화장실이라 그렇다고 변명할 지 모르지만, 이동화장실이 필요한 곳이라면 공사를 서둘러 온전한 화장실을 빨리 갖춰야 한다. 국내외 관광객이 넘치는 올레의 더러운 화장실은 우리 모두를 우울하게 했다.

지방 선거, 일 잘할 사람 뽑아야

지방선거를 앞두고 곳곳에서 스마일 경쟁, 절하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규격품 인사와 웃음이 흘러 넘치고 있다. 전화 선거 운동이 역겨워서 전화를 아예 안받고, 길에서 선거운동원들을 보면 다른 길로 피해간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제 겉치레 경쟁을 치우고 본질을 생각할 때다. 선거도 예외가 아니다. 모든 치장을 벗겨내고 정말로 일 잘할 것 같은 사람을 뽑아야 한다. 치장이 본질을 가리고 있다. 역겹더라도 선거용 인쇄물을 펴 놓고 오랜 시간 꼼꼼히 본질적으로 나쁠 것 같지 않은 후보를 골라내야 한다. 사람을 잘못 뽑으면 그 어떤 분야보다도 해악이 심한 분야가 정치다. 투표를 안 하는 것은 생산적인 선택이 아니다.

장명수 본사 고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