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끝에 굳게 채워져 있던 빗장이 마침내 열었다. 교묘하고도 복잡한 해외자금도피와 돈세탁 과정을 추적한 끝에, 결국 국세청이 결코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스위스 비밀계좌에 숨은 돈까지 찾아낸 것이다.
우리나라 세정사상 최대규모인 6,224억원의 해외탈루소득을 적발한 국세청은 3,392억원의 세금추징과 함께 해당 4개 기업 및 오너들을 의법 조치키로 했다. 조사기간만 6개월이 넘었으며, '수사'를 방불케 할 만큼 외국 세무당국과 치밀한 공조가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촘촘해진 국제공조
이번 국세청의 해외탈세적발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스위스, 홍콩, 싱가폴 등에 있는 비밀 계좌의 은닉자금을 확인했다는 점. 워낙 철저한 비밀주의 때문에 소문만 무성했던 '스위스 비밀금고'의 문을 마침내 뚫은 것이다.
그 동안 스위스와 싱가폴은 우리나라와 조세협약을 체결했지만 금융정보는 제공하지 않았고, 홍콩은 조세협약 자체가 체결되지 않아 대표적 해외 재산 도피처로 지목됐었다. 국세청은 계좌 확인 과정에 대해서는 조사 기밀을 이유로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세정당국간 국제 공조가 그만큼 강화된 결과"라고 말했다.
실제로 국제사회에선 해외재산도피에 대해 철퇴를 가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 금융기관의 고객비밀보호도 중요하지만, 범죄자금이나 부도덕한 자금에 대한 추적과 과세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각국 세무당국간에 확산되고 있다. 때문에 지난해 4월 주요20개국(G20) 정상들이 역외탈세 근절에 적극 나서자는 데 합의하고, 6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대표들이 조세피난처 국가들에 제재를 가하겠다고 입장을 밝히면서 해외 탈세에 대한 국제공조는 본격화되고 있다.
급기야 지난해 8월엔 스위스 대형은행인 UBS가 '고객비밀보호'의 원칙을 깨고, 미국 국세청(IRS)에 탈세 혐의 고객 명단을 일부 공개하기도 했다. 국세청 관계자는 "최근 들어 각국 정부간 해외탈세자에 대한 정보 공유를 통해 해외 은닉 재산의 이동경로를 확보하면서 해외 탈세 추적 환경이 상당히 개선됐다"고 밝혔다.
정교해진 탈세 수법
해외 탈세에 대한 국제 공조가 강화되는 것은 그만큼 탈세 수법이 지능화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적발된 모기업 사주는 해외에 페이퍼 컴퍼니(유령회사)를 만들어 놓고 이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한 다음 수 차례의 자금세탁까지 거쳐 스위스 비밀 계좌에 숨겼다. 게다가 은닉한 자금을 다시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말레이시아의 라부안 등에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국내로 반입해 골프장과 부동산을 매입하기도 했다.
해외에 특수목적회사(SPC)를 차려놓고 재산을 빼돌린 경우도 있었다. 모기업 사주는 해외 SPC에 투자하는 형식으로 기업자금을 해외로 빼돌리고, 그 자금을 다시 미국 페이퍼 컴퍼니의 신탁계좌에 송금해 해외고급주택을 구입했다. 한 도매ㆍ무역업체 사주는 홍콩에 차명으로 만든 SPC를 통해 국내법인이 발행한 주식예탁증서(DR)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탈세를 저질렀다.
국세청은 이처럼 해외 탈세의 규모가 커지고, 수법도 갈수록 교묘해짐에 따라 그 동안 태스크포스(TF)로 꾸려온 '역외탈세추적전담센터'를 상설조직으로 전환키로 했다. 또 역외탈세 정보수집을 강화하기 위해 `해외금융계좌신고제' 도입, `해외정보수집요원파견제' 신설 등을 관계기관과 협의를 거쳐 추진할 방침이다.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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