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후각을 지닌 글로벌 투자자금이 '공포의 냄새'를 맡아 대이동을 시작했다. 이동방향은 안전자산. 연초 만해도 글로벌 자금은 '초(超) 저금리'와 글로벌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수익률 높은 신흥시장 주식이나 원자재 등 위험자산으로 쏠렸으나 또다시 미국 국채 같은 안전자산 쪽으로 선회하는 분위기다.
변화의 기폭제는 유럽 재정위기다. 이 문제가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에 그치지 않고 세계적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감'이 확산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안전자산 쏠림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닌데, 천안함 사태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가 급부상할 경우에는 외국인 투자자금의 급격한 이탈도 우려된다.
다시 '안전한 곳' 찾아가는 돈
일본 도쿄 시장에서 미국 국채(10년 만기) 수익률은 24일에도 또다시 하락, 3.22%를 기록했다. 이달 들어서만 0.4%포인트나 하락(채권가격 상승)한 것인데,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12월 이후 한달 낙폭 기준으로 가장 큰 것이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이 미국 국채인만큼, 미 국채 금리가 떨어진다는 건 글로벌 자금의 위험회피 성향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환 시장에서도 미국 달러화와 일본 엔화가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위험자산 선호현상이 강했던 3, 4월까지만 해도 달러화 대비 강세를 보인 원화, 호주 달러, 뉴질랜드 달러 등이 5월 이후 급락세로 돌아선 것. 유로화의 위기가 '안전통화'로서 달러화의 가치를 높게 만든 대신 신흥시장 통화의 가치는 끌어 내리고 있다.
실물경제는 엉망이지만 일본 엔화 역시 유로화 부진 덕분에 뜀박질하고 있다. 지난 주말 엔ㆍ달러환율은 3월 이후 90엔대가 다시 무너져 89엔까지 떨어졌다. 고수익을 찾아 밖으로 나갔던 엔화자금(엔 캐리 트레이드자금)이 안전자산 선호심리 속에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과 관계 없이 급상승하는 분위기다.
상품 시장에서도 이런 현상이 뚜렷하다. 지난달 말 배럴당 87달러까지 올랐던 국제유가(미국 서부 텍사스유 기준)는 지난 주말 70달러 아래까지 급락했다. 유럽 발 재정위기의 공포감이 커지면서 원유에 몰려있던 투기성 자금이 빠르게 청산된 것이다. 반면 금값은 이달 초 사상 최고치까지 치솟았다.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금값은 유로, 달러 등 주요 통화가 약세를 보일 때 '최후의 보루'로서 강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투자자 국내 주식 기피, 채권 선호
안전자산 선호 현상은 국내 금융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3~4월까지만 해도 우리 주식시장에서 대규모 순매수를 지속하던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달 들어 24일까지 5조4,000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증시 전문가들은 이탈 자금 중 절반 이상을 유럽계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 관련 글로벌 펀드에서도 3주 연속 자금이 순유출되고 있다.
채권 시장에서는 외국인의 이탈 조짐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리스크가 커진 유럽 채권시장에서 이탈한 자금이 국내로 유입되는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한국이 포함된 이머징 채권형 펀드에는 2주 연속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
배민근 연구원은 "주식시장은 안전자산 선호현상으로 국가를 가리지 않고 전반적으로 자금이 빠지는 반면, 채권시장은 국가별 부도위험 정도에 따라 자금 유입이 차별화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등 신흥시장국은 재정상태가 유럽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기 때문에 채권가격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안함 침몰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가 본격화할 경우에는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될 수도 있다. 가능성은 낮지만 남북관계 경색이 무력 충돌 등으로 치달을 경우 채권시장에서도 외국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 있다.
실제로 24일 원ㆍ달러환율이 1,200원대로 치솟은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한 시장관계자는 "환율 급등은 대부분 글로벌 금융시장의 움직임 때문이지만, 남북한간의 긴장 고조라는 특수 여건도 반영됐다"고 말했다. 경제관련 국제 통신사인 블룸버그도 일본 도쿄 외환시장 관계자의 말을 인용,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승하고 있다"면서 "이는 위험 회피현상에 가속도를 붙여 (원화 대신) 엔과 달러화에 대한 수요를 늘릴 것"이라고 보도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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