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위기 해결을 위해 유럽 국가와 국제통화기금(IMF)이 발 벗고 나섰다. 독일 프랑스 등이 800억유로, IMF가 300억유로를 출연하기로 했다. IMF는 미국의 통제를 받는 기관이니 유럽과 미국이 모두 나선 셈이다. 여느 나라의 위기라면 IMF가 주역이 되겠지만, 그리스의 경우는 유로화 유지라는 과제가 있는 데다 자국 은행들이 물려 있는 독일과 프랑스가 주역이 되었다.
97년의 IMF는 황당사건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국인이 생각해 볼 일은 없는가. 한국도 1997년 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생각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그리스 사태에 비추어 참으로 이상한 일이 97년 한국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지금 그리스에게 독일이나 프랑스가 구제금융을 주는 것을 미국이 저지하고 IMF로 가게 하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한국의 97년 위기 당시 지금의 독일이나 프랑스에 해당하는 나라가 있었다. 바로 일본이다. 90년대 중반에도 일본의 금리가 낮아서 한국의 은행들이 단기자금을 대거 빌렸다. 그러다가 97년 여름 일본 은행들이 자국 내에서의 금융 불안으로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자금을 회수하지 않도록 은행을 '행정지도'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일본 정부는 그렇게 했다. 일본은 나아가서 한국에게 외화준비금을 빌려주려 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경제는 지금의 그리스와는 비교가 안 되게 건전했다. 재정은 균형상태에 있었고, 국제수지는 96년에 적자를 기록했지만 97년에는 개선되고 있었다. 자금을 빌렸던 은행이 부실했지만, 그것은 정부가 지불 보증을 했기 때문에 외환위기를 일으킬 사유는 아니었다. 당시 한국은 유동성이 부족했을 뿐이고, 그것도 일본의 협조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더니 그 해 9월 미국이 일본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미국은 왜 그랬는가. 그 전 반복적으로 요구해도 한국이 들어주지 않았던 자본시장 개방을 관철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자신이 통제하는 IMF로 가게 한 것이다. 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이런 과정을 거쳐 일어났다. 지금의 그리스 위기는 그 과정이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는지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97년 이전에는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 한국은 80년대까지 몇 차례 외환위기가 일어날 계기가 있었지만, 미국이 최종대부자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 때문에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2008년 한국이 97년과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미국이 통화스왑을 해 주었다.
97년과 그 이전과의 차이를 결정한 것은 국제정치다. 80년대까지는 냉전의 시대였고 한국은 그 '선봉장'이었다. 97년에는 냉전이 끝난 상태였고, 한국은 미국 말을 잘 안 듣는 '신중상주의' 국가였다. 반면 2008년 통화스왑은 정치적 동기보다는 세계 금융위기 차단이라는 경제적 동기로 이루어졌다.
자본시장 개방 유도한 미국
앞으로는 어떨까. 냉전시대와 같은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반면 97년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당시 일본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던 사람들이 지금 오바마 정부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한편 물론 2008년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 요는 한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객관적 해결절차가 없고 그때그때 강대국의 결정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위기가 안 일어나게 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외환위기가 재발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97년 위기가 '황당'한 것이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위기가 일어나는 과정이 황당했기 때문에 그 결과도 그랬다. 위기는 단기자본 이동을 먼저 자유화하여 개방의'순서'를 안 지킨 데서 비롯되었지만, 위기 후 IMF는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하게 했다. 결국 순서를 안 지킨 것을'제도화'한 것이다. 이런 잘못을 고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 아닌가.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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