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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33> 매창, 재주와 정이 넘쳤던 부안 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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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33> 매창, 재주와 정이 넘쳤던 부안 명기

입력
2010.05.23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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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창(梅窓)으로 널리 알려진 부안 명기 이계랑(李桂娘ㆍ1573~1610)은 임진란 전후에 한시(漢詩)를 잘 쓴 시인으로, "북의 황진이 남의 매창"으로 불리었다. 허균(許筠)과 유희경(劉希慶ㆍ1545~1636)을 비롯한 수많은 문인 소객들이 그를 찾아 부안을 오르내렸고, 그들과 주고받은 시 58편이 에 전한다. 38년이란 짧은 삶에도 그 예술적 재주와 정(情)으로 나라 안에 이름났다.

"일찍이 남국에 계랑 이름 소문 나/ 글 솜씨 노래 재주 서울까지 울리더니

오늘에야 그 모습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 입고 내려온 듯하구나(曾聞南國癸娘名 詩韻歌詞動洛城 今日相看眞面目 却疑神女下三淸) "

유희경이 젊어서 부안에 놀며 인데, 계랑 또한 그를 보자, "유(劉)와 백(白) 가운데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때 유희경과 만리(萬里) 백대붕(白大崩)이 문명을 떨쳤기 때문이다. 백대붕은 임진년에 의병활동 중에 전사했고, 유희경도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 임란 전 유희경이 마흔여덟, 매창이 스무 살쯤의 일이리라. 그리고 지루한 전쟁이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 1601년 7월에 매창은 부안을 지나던 교산 허균과 만났다. 교산은 이때 비를 피해 객사에 머물렀는데, 매창이 거문고를 끼고 찾아와 하루 종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고 했다. 교산이 33, 매창 29살이던 한창 시절에 그는 매창을 이귀(李貴)의 정인(情人)이라 조심했고, 밤이 되자 매창이 자기 조카딸을 교산의 침소에 들여보냈다고 했다. 이귀는 일찍이 장성 현감과 김제 군수를 지낸 사람이고, 그 전에 매창은 석주(石洲) 권필(權韠)과도 사귀었고, 1602~03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된 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과 사귀었다고 한다. 1607년에는 유희경이 일 때문에 부안에 와서 15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매창이 그에게 열흘만 묵어가라는 시를 주었다 한다.

매창의 정과 그리움을 가장 잘 그려 유희경에게 주었다는 시조 한 수가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애창된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을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매

배꽃 흩날리는 봄날에 울며 잡고 이별한 그 님을 천리 밖에서도 잊지 못하는 가을날의 외로운 정이 살갑다. 그 매창이 38의 아까운 나이로 죽었을 때 유희경은 "이원(梨園)에 한 곡조 남겨놓고 갔구나(只有梨園餘一曲)"하여 그도 '이화'로 조상했다. 허균은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였다(淸歌解駐雲)"는 시를 읊어 통곡했다고 하는데, 남녀의 정은 하늘이 준 것이라고 강조했던 교산과 매창의 평생 사귐이 진정(眞情)을 실감케 한다. 부안의 아전들이 그미의 시편을 모아 《매창집》을 전했는데, 그미가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는 매창 뜸(매창 마을: 가람 이병기 선생의 시비에서 인용)에선 오늘도 남녀노소 를 읊으리라.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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