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전 경남 산청군 단성면 호리 523. ‘땡땡땡’울리는 학교종이 고스란히 남은 옛 초등학교 건물엔 대안학교인 지리산고가 자리하고 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개 한 마리 외엔 딱히 눈에 띌게 없을 정도로 한적한 시골마을에 위치한 학교지만, 학교 내부로 들어서면 향학열에 불타는 학생들로 활기가 넘친다.
지리산고는 교육비과 숙식비가 전액 무료인 전국 유일의 특성화 대안학교다. 이 학교 출신의 잠비아 국적 유학생 켄트 카마숨바가 서울대에 입학해 졸지에 유명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리산고는 보통 학교와 다른 점이 두드러진다.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는 교장과 교사, 더 나은 교육을 만들기 위해 신념으로 후원에 동참하는 1,000여명의 회원과 기업, 여기에 ‘조금 특별한’ 지리산고 재학생들이 혼연일체가 돼 새로운 교육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뭔가 다른 교사들
“우리 아(아이)들 미술공부 무료로 해줄 수는 없심까(없습니까)?”
미대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있지만 마땅히 지도해줄 교사가 없자 박해천 교장이 진주의 한 미술학원에 직접 전화를 걸어 통사정을 했다.“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으나, “한 달만 해보고 소질이 있는지 없는 지만 봐 주이소”라는 박교장의 설득에 다행히 기회가 주어졌다.
학생들은 강습 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해 청소를 했고 가르쳐준 강사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지리산고 특유의 인성교육에 덕택이다. 학생들의 예의바른 행동은 미술학원 원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계속 다녀도 좋고, 기초가 부족하니 시간을 더 많이 빼달라”고 미술학원 측이 오히려 박 교장에 부탁하게 됐다. 지난해 미술학원에서 실기를 배웠던 학생들은 모두 대학의 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돈이 없어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해선 안 된다”는 교육 철학을 갖고 있는 박 교장의 머리엔 학생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지리산고에는 박 교장 외에도 10여명의 상주교사, 전ㆍ현직 교수와 유명 학원 출신 강사들까지 나서 수업을 지원하고 있다. 좋은 조건의 다른 학교를 마다하고 지리산고의 교육 취지에 동참해 뛰어든 교육자들이다.
매주 한 차례 무료 논술강의를 위해 지리산고를 찾고 있는 김열규(78) 서강대 국문학 명예교수는 “노년에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라며 “힘이 다할 때까지 봉사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리산고에서 교사와 학생들 사이엔 스승과 제자 이상의 끈끈함이 있다. 기술ㆍ가정을 맡고 있는 이종화 교사는 “학생들을 발견하고 두 팔을 벌리면 먼 발치에서부터 달려와 안긴다”며 “순수한 마음으로 따르는 아이들을 위해선 무엇이라도 베풀어야 한다는 마음이 들 뿐”이라고 전했다.
특별한 학습 분위기
특별히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지 않는데도 졸업생 전원이 대학에 진학할 만큼 성적이 향상되는데에는 지리산고만의 비결이 있다.
교육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는 게 장점으로 꼽힌다. 휴대폰을 소지해선 안 되고 컴퓨터도 마음껏 쓸 수 없어 공부에 전념할 수 밖에 없는 여건이 조성돼 있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3학년 강태규(18)군은 기숙사를 벗어나고픈 충동을 느낀 적이 없느냐는 질문에 “탈출하려면 지리산을 넘어야 한다”고 웃어 넘겼다.
많은 외부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다양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국어 영어 수학 심화 학습뿐 아니라 프랑스어 일본어 등 외국어와 연극, 태권도 등 다양한 방과후 전문 프로그램을 실력 있는 외부 강사들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방학 중에는 서울대 학생들이 참여하는 멘토링 캠프 등을 연다.
효율적인 학습 방법을 과감히 도입하는데에도 주저함이 없다. 올해부터는 국내 고교 중 처음으로 정규수업 때 핀란드식 블록수업 방식을 도입했다. ‘드릴(Drill)형 수업’으로 불리는 이 방식은 낙오자 없는 교육을 추구하는 핀란드 교육에서 착안했다. 수업 과정에 스스로 복습하는 시간을 마련해 학생이 그날 배운 것을 그날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과목별 수업을 110분으로 정해 20분 예습, 30분 강의, 10분 휴식, 20분 수업, 30분 첨삭 및 복습으로 진행하고 있다. 예습과 강의, 복습을 한 번에 끝내 학습효과를 높이는 형태다.
지리산고는 지난달 ‘드릴형 수업’시스템을 개발한 교육전문기업 비상교육과 MOU를 체결한 뒤 곧바로 고3과 고2 일부 교과에 적용했다. 지리산고는 교육청에 교육력 제고 관련 시범학교 지정을 신청한 상태다. ‘드릴형 수업’과 4학기제 운영, 영수 심화과정, 선택과목 확대 등이 교육력 제고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지리산고 측의 판단이다.
입학 문호는 좁은 편
지리산고가 유명세를 타면서 어려운 처지의 많은 학생들이 입학과 전학을 문의하고 있지만 문호는 넓은 편이 아니다. 3학급 67명이 수용 한계인 탓이다.
박 교장은 “우리 사회엔 의지는 있지만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는 학생들이 아직 너무 많다”며 “우선 건물을 신설해 수용인원을 늘리는 게 급선무이며, 그럴려면 외부의 경제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산청=박철현기자 k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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