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가지 위에 돌 하나가 턱하니 올라앉아 있다. 옆에 걸린 TV 모니터에서는 누군가 돌을 향해 '너는 돌이 아니라 한 마리의 새'라는 내용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다. 교육의 결과 그 돌은 정말 자신이 어딘가로 날아갈 수 있다고 믿게 될까.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김범(47)씨의 작품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이다.
회화, 비디오,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는 김씨는 이처럼 우리가 흔히 보고 아는 일상적 대상에 담긴 의미를 뒤집어 표현함으로써,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작업으로 주목받는 작가다. 석남미술상(1995),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2001), 선미술상(2007) 등을 수상한 그는 손잡이 부분을 불룩하게 만든 '임신한 망치', 라디오와 다리미의 기능을 맞바꾼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라디오' 등 유머와 상상력 가득한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3년 만에 여는 이번 개인전에서 김씨는 사물과 그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그는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을 본다. 따라서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전시장에는 유독 교육과 관련된 작품들이 많다.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이라는 작품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주방 세제, 선풍기, 주전자, 저울 등 온갖 생활용품이 나무 의자 위에 앉아 칠판을 보며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다. 국어 강사가 돌을 향해 시인 정지용의 시에 대한 강의를 하는 동영상이 나오는 모니터, 그리고 그 화면 속의 돌을 함께 설치한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에 이르면,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읽힌다.
하지만 김씨는 "딱히 교육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담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상에 어떤 의미가 담기는 과정을 표현한 겁니다. 교육이라는 경험을 통해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갖고 있는 지식 등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교육을 소재로 삼은 것이죠. 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처음부터 용도나 의미가 정해지는 인공적 물체들에 비해 비교적 본래 가진 의미가 없기 때문이에요."
'무제(그 곳에서 온 식물)'은 신문에 실린 식물 사진들을 덧붙여 입체적인 식물 모양을 만든
뒤 화분에 심은 작품이다. 전시 기간 중에도 작가에 의해 점점 더 자라나는 이 식물은 우리가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통로인 미디어의 의미, 그리고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지는 가상적 현실성을 생각해보게 한다.
약육강식과 주종의 관계를 뒤집는 작품들도 눈길을 끈다. 영상 작품 '볼거리'는 야생동물의 생태를 보여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영상을 재구성한 것이다. 치타와 영양이 치열하게 초원을 내달리고 있는데, 쫓는 것이 영양이고 쫓기는 것이 치타다. 비디오 '말 타는 말'에서는 말 위에 사람 대신 말이 타고 있고, 애니메이션 '10개의 움직이는 그림들'에서는 늑대가 양처럼 풀을 뜯어먹고, 기린은 목이 짧아서 높은 곳에 매달린 열매를 따먹지 못한다.
김씨가 개를 소재로 쓴 짧은 이야기책 '눈치'도 미술 작품으로 전시됐다. 오직 글을 통해 가상의 개의 이미지를 실감나게 전달함으로써 실재와 이미지의 관계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김씨는 지난해 미국 LA와 휴스턴에서 열린 '당신의 밝은 미래: 한국현대미술 12인'전에 참가한 데 이어 오는 11월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 내년 2월 LA 레드캣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그는 조각가 고 김세중(1928~1986)과 시인 김남조씨의 아들이다. 전시는 8월 1일까지. (02)733-8945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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