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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16> 서대문형무소와 독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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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16> 서대문형무소와 독립공원

입력
2010.05.17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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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중 독립 투사 고난의 현장에 이젠 아이들 영어 재잘거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서대문독립공원은 연간 180만여 명이 찾는 명소다. 사직터널과 금화터널을 잇는 고가도로 아래 넓은 광장 초입에 독립문이 서 있고, 그 뒤에 서재필 동상이 있다. 그 위로 왼쪽에 보이는 커다란 기와집은 독립협회가 사무실 겸 행사장으로 쓰던 독립관을 복원한 것이다.

서대문형무소는 거기서 좀더 올라가야 한다. 높이 10m 망루가 솟아 있는 붉은 담장 너머, 붉은벽돌 건물들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갇혀 악형에 시달렸던 고난의 현장이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관련 기록을 대부분 없애버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이곳에 수감됐던 애국지사는 4만여 명, 처형ㆍ옥사 등 순국자는 4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일제가 항일 의병을 잡아 가두기 위해 지은 근대식 감옥이다. 일제는 서대문형무소를 세 번에 걸쳐 확장했다. 1919년 3ㆍ1운동 직후 손병희, 한용운, 유관순 등 애국지사를 비롯해수감자가 3,000명을 돌파해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시설을 확장하기 시작, 처음 500명이던 수용 규모를 3,000명까지 늘렸다.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까지 감옥으로 쓰였다. 해방 후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계속 바뀌어 쓰이다가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이전하면서 공원화 사업이 시작됐다. 당시 전부 철거될 뻔 했으나 역사학자들과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의 반대로 건물 일부를 남기고 헐린 자리에 공원을 만들어 오늘에 이른다.

1998년부터 이곳은 독립운동사를 보여주는 역사관으로 바뀌어 관객을 맞고 있다. 서울구치소 이전 당시 헐리지 않고 남은 보안과 청사와 중앙사, 5개 동의 옥사와 노역장이던 공작사, 사형장, 1992년 발굴된 지하감옥 등을 전시ㆍ교육 현장으로 쓰고 있다. 매년 57만여 명이 찾아온다. 입장객의 10%는 외국인이고 그 중 절반이 일본인이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강점기에 국토 전체가 감옥으로 변한 조선의 상징이다. 1907년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조약)을 체결, 조선의 사법권과 감옥 업무를 빼앗았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협박해 군대를 해산한 다음 신협약을 강제했다. 이에 항거하는 수만 명의 의병을 가두려면 대형 감옥이 필요했다. 신축 당시 서대문형무소의 수용 인원은 500명 정도로, 이는 당시 전국 8개 감옥의 수감자 숫자와 맞먹는 것이었다.

일제는 서대문형무소를 시작으로 형무소를 늘려간다. 1908년 전국 8개 지역에 감옥을 설치하고 각 본감 산하에 분감을 두어 조선 전역을 옭아맨다. 1930년대 전국의 형무소는 형무소 14개, 형무지소 11개, 소년형무소 3개 등 28개에 이른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1913년 361만여 명이던 전국의 형무소 재소자 연인원은 1930년 609만여 명으로 급증한다. 당시 조선 인구가 1,878만명이었으니, 3명에 1명 꼴로 감옥살이를 한 셈이다. 일제 말 독립운동 등으로 체포된 정치ㆍ사상범은 1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서대문형무소는 가혹한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공포의 공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서대문 한복판에 들어선 거대한 감옥의 높은 담과 망루는 곧 조선 전체가 일제의 수인이 됐음을 선언하는 폭력적 장치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는 관객들은 일제 폭압의 음산한 공포를 간접적으로 느낄 뿐, 몸이 움츠러들지는 않는다. 보안과 청사의 지하와 공작사 건물에 재현해 놓은 고문체험실에서 이곳에 수감된 독립투사들이 겪은 끔찍한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밀랍인형으로 상황을 재현하고 비명 소리 등 음향효과를 넣어 전시 중이다. 그 방식이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역효과를 부른다는 비판도 있다.

일요일인 지난 16일 오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어린이 단체 관람객이 많았다. 그 중 외국인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영어로만 이야기하는 어린이들이 눈에 띄었다. 한국의 문화ㆍ역사 현장을 탐방하면서 영어로 말하기를 배운다는, 한 업체의 교육 프로그램 참가 학생들이었다. 영어 교육이야 나쁠 게 없지만, 일제에 맞섰던 선열의 수난 현장을 외국인 강사에게서 영어로 배우고 말하는 어린이들을 보는 기분은 묘했다.

이 아이들을 인솔하는 한 외국인 강사에게 서대문형무소를 본 소감을 물었다. 고문체험실의 전시 방식이 너무 자극적이지 않냐는 질문에 뉴질랜드 사람이라는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그런 면이 있죠. 하지만 실제 역사는 이보다 더 잔혹했죠.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뉴질랜드 군인 등 포로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한국이 식민지 시기에 겪은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형무소 구내 사형장으로 갔다. 높은 담장 안에 일본식 목조건물이 있다. 교수형이 집행된 곳이다. 그 옆 시구문은 시신을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다.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굴 안을 들여다 보던 노인들이 말했다. "일본 놈들, 참 악독했지. 징글징글해."

반일 감정이든, 애국의 다짐이든, 서대문형무소를 찾는 이들은 저마다 한가지씩 생각을 갖고 돌아갈 것이다. 웃고 떠들면서 들어온 아이들이 나갈 때는 표정이 다르다.

역사관을 나와 공원으로 갔다. 녹음이 울창한 공원은 봄빛을 즐기는 사람들로 한가롭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도 있고, 지팡이를 짚고 산보하는 노인들도 보인다. 광장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수조 주변으로는 물을 튕기면서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진다. 일제강점기에는 꿈꿀 수조차 없었던 그 풍경 너머로 서대문형무소의 담장이 겹친다.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 2020년까지 여자감옥 등 3단계 복원

서대문독립공원 자리는 원래 일제강점기에 서대문형무소 관할 부지였다. 공원 면적 11만㎡ 중 2만9,000㎡만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1987년 서대문형무소(당시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이전할 때 많은 건물들을 헐어낸 자리가 공원이 됐다.

서대문구는 지난해부터 서대문형무소 원형 복원에 들어갔다. 복원은 2020년까지 3단계로 이뤄진다. 1단계 사업은 2011년까지 한다. 지난해 보안과 청사 외벽의 하얀 타일을 벗겨낸 데 이어 현재 취사장을 복원 중이다.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지하감옥에 씌운 보호각은 없앤다. 이 보호각은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이 문을 열 때 설계 공모를 해서 세운 것인데, 일본풍이 짙다는 비판이 높았다. 현재 41.03m만 남아 있는 주벽 담장은 125.5m로 확장 복원한다.

2단계(2012~2015)로 여자 감옥과 공장 터를 복원하고, 주차장을 지하화하고, 담장을 추가 복원한다. 마지막 3단계(2016~2025) 계획은 구치감을 복원하고 종합전시박물관을 마련하는 것이다. 지금의 전시관은 너무 비좁다.

서대문형무소 복원과 활용 계획은 일제강점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서대문형무소의 해방 후 역사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애국지사뿐 아니라 해방 직후 좌우 이념 갈등과 한국전쟁, 분단,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수많은 정치ㆍ사상범을 수감한 곳이기도 하다. 이를 외면한다면, 서대문형무소가 감옥으로 쓰인 80년 중 절반의 역사를 잘라버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 독립문에 대한 오해와 진실

현재 서대문독립공원에는 독립문과 독립관, 서재필 동상 등이 서 있어서 1896년부터 1898년까지 활동하였던 독립협회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런데 독립문에 대한 일반적 상식에는 많은 오해가 있다.

공원 내 안내문에도 문제가 많지만, 특히 서대문독립공원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1895년(고종 32년)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 박사가 조직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우리나라가 중국, 일본, 러시아와 그밖의 서구 열강과 같은 자주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선포하기 위해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하고, 1896년 7월부터 최초로 전 국민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한 성금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다"는 내용은 틀린 부분이 많다.

첫째, 독립협회는 서재필이 조직한 단체라고 할 수 없다. 서재필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독립협회를 조직한 것은 이완용을 비롯한 관료들이다. 특히 이완용은 당시 외부대신으로서 독립협회의 창립총회를 거행하였고 건립위원장을 맡았다. 이완용은 2대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완용이 왜 나중에 친일파로 돌아섰는지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지, 있었던 역사마저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다.

둘째, 독립협회가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한 것이 아니다. 영은문은 중국의 사신이 서울로 들어올 때 맞는 문으로서 속방외교의 상징이었는데 이미 청일전쟁으로 서울에 침입한 일본군이 헐어버려 독립문 건립 당시에는 아래 기둥만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독립협회는 영은문이 헐린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셋째, 독립문의 건립 목적은 조선이 모든 열강과 같은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기 위해서라고 하기 어렵다. 독립문 건립이 발기되던 1896년 7월,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독립문의 건립은 어디까지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한다는 취지였다. 이는 일본의 논리에 말려들어간 것이기도 했다. 조선은 이미 독립국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청으로부터 독립시켜 주었다고 선전했지만, 실은 청을 몰아낸 후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다가 아관파천으로 좌절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독립협회가 말한 독립은 일제 하의 독립운동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러므로 현재 독립관에 일제 하 독립운동으로 순국하신 선열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

넷째, 독립신문에 관련된 서재필의 업적이 과대평가되고 있다. 독립신문 발행은 갑오개혁 시기에 정부가 추진한 사업으로 서재필에게 진행을 맡긴 것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정부가 바뀌었지만 새 정부도 전적인 지원을 하여 모든 비용을 댔고 모든 관공서가 독립신문을 구독하도록 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한 서재필은 당시 미국인 필립 제이슨, 한국명 '피제손'으로 활동하였다. 그럼에도 독립신문을 자신의 소유로 등록하였고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일본에 팔려고 했던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따라서 신문의 날을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로 정하고 독립공원에 서재필 동상을 세운 언론계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 최초의 한글 신문은 일본인들이 1895년 2월에 창간한 한성신보다. 그럼에도 한국 최초의 한글 신문이 독립신문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이 발행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독립신문은 한국인 서재필이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 피제손이 발행한 신문이다. 따라서 신문의 날은 한성순보가 창간된 1883년 10월 1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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