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35> 당쟁사(黨爭史)의 줄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35> 당쟁사(黨爭史)의 줄기

입력
2010.05.17 12:59
0 0

당쟁은 붕당(朋黨)이 서로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창(李建昌)의 (黨議通略)에 나오는 '붕당지쟁'(朋黨之爭)의 준 말이기도 하다. 그러면 붕당이란 무엇인가? 같은 스승의 제자들로 구성된 편당(偏黨)을 말한다. 그러므로 붕당은 학연(學緣)과 혈연(血緣) 지연(地緣)으로 뭉친 학단(學團)이라 할 수 있다. 퇴계(退溪) 남명(南冥) 율곡(栗谷) 우계(牛溪) 학단 등이 그러하다.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이다. 사림파가 막강한 훈구파와 싸울 때는 단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조 초년에 훈척세력이 무너지고 사림파가 집권하자 분열해 붕당이 생기고 붕당 간에 당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기호의 선배당(서인)과 영남의 후배당(동인)으로 갈리더니 동인이 우세해지자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인 북인이 갈렸다. 퇴계 제자인 유성룡(柳成龍)이 임란 후 주화(主和)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데 비해 남명 제자인 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인은 광해군 조에 기호의 화담(花潭) 학단과 연립정권을 세워 결속력이 약해 사분오열되어 싸우다가 인조반정으로 무너졌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차지한 서인은 북인들이 정권을 독차지했다가 망한 것을 교훈 삼아 소북 등 온건세력을 모아 관제야당인 남인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남인이 현종 조에 효종 내외에 대한 인조의 왕비(조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는 예론(禮論)을 들고 나왔다. 이른바 기해·갑인 예송(禮訟)이다. 그리하여 숙종 조에 이르면 서인과 남인의 밀고 밀리는 서·남 당쟁이 심하게 일어나 국가가 망하게 생겼다.

이에 국가를 살리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고 4색당파를 고루 쓰자는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이 대두하게 되었다. 어차피 왕권이 신권을 누를 수 없어 당쟁이 일어난 마당에 타협안으로 대두된 이론이다. 반면에 사림정치의 틀은 무너졌다. 그런데 영조는 온건파를 중심으로 탕평책을 썼는데 비해, 정조는 강경파를 중심으로 탕평책을 썼다. 그리고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대민정치를 개선해 영·정조조의 문운(文運)을 일으키기도 했다. 정조는 군주도통론을 내걸어 정국을 국왕 중심으로 이끌어 갔다. 그리하여 4색당파보다는 사도세자를 동정하느냐 여부를 가지고 정국이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갈렸다.

그러나 탕평의 파트너로서 외척세력이 성장해 외척세도정치의 길이 열렸다. 그리하여 19세기에 생산력은 저하되고 세도가문의 가렴주구(苛斂誅求)로 민란이 일어나고 외세가 개입해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이다. 외척세도정치 때문에 국가가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해 서세동점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나라가 망한 것은 당쟁뿐 아니라 몇몇 노론가문의 외척세도정치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