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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인터뷰] 여성 최초 히밀라야 14좌 완등 오은선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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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인터뷰] 여성 최초 히밀라야 14좌 완등 오은선 대장

입력
2010.05.16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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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용 모자라 셰르파 없이 등정도 호화 상업등반이란 말은 억울해요

"봉우리당 2,500만원씩 들고 오른 거에요. 호화 상업등반이라 하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셰르파도 못구해 후배와 단둘이 오른 적도 있어요.

히말라야 14 봉우리의 큰 짐을 벗어 던져서인지 오은선 대장의 얼굴은 밝았다. 라이벌인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이 제기했던 칸첸중가 등정 의혹 제기 등으로 속앓이를 했을 터인데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당당했다.

여성 최초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오 대장을 9일 서울에서 만났다. 남성들도 하기 힘든 대업을 이룬 그이지만 몇몇 질문에선 눈물을 글썽거렸다. 고 고미영씨의 얼굴이 떠올라 눈을 끔벅거렸고, 세상의 편견과 질시가 억울해 고개를 돌려야 했다. 너무 힘들고 고생했던 그때를 떠올릴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히말라야 8,000m급 14 봉우리 중 가장 잘 맞았던 산과 가장 힘들었던 산을 꼽을 수 있습니까.

"어떤 산을 막론하고 힘들지 않은 건 없었어요. 3년 전부터 일년에 여러 개씩 오르다 보니 체력적인 한계로 신체적 고통이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2008년 마칼루를 오르고 연이어 로체를 등정한 뒤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죠. 다 지나고 나니 그 힘겨웠던 것을 다 잊고 그때 그랬었지, 하고 회상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고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고요."

-남들은 가장 힘들다던 K2가 의외로 잘 받아줬다고 했는데요.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어요. 보틀넥 구간이라고 악명 높은 코스가 있어요. 큰 사고도 났던 구간이에요. 남들이 왜 가장 어렵다고 하는지 실감했어요. 그곳을 통과한 뒤 내려오고 나서는 제가 다녀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너무 감사할 일이죠. 당시 개인적으로 무척 스트레스가 많았던 시기였거든요."

-작년 말 국내서 칸첸중가 등정에 대한 의혹이 일었어요. 많이 서운하지 않았는지요.

"왜 서운하지 않겠어요 저도 사람인데요. 칸첸중가 산신이 알고 있어요. 전 신을 속인적 없고요(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많이 속상했죠. 힘겨웠던 순간을 견뎌내고 나면 금세 잊어버리고 그 다음을 준비하면서 등반을 다녔어요. 안나푸르나에서 뒤돌아 서고 왔을 때인데 그런 일이 벌어져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아무하고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산 다니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어요."

-당시 기자회견 때 너무 기운이 소진된 것 같아 14좌 완등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저도 그걸 걱정했어요. 여기 휘말려 정신적 에너지 소비하고 나면 안나푸르나 재도전이 힘들 것 같아 빨리 잊으려 굉장히 노력했고, 덕분에 빨리 잊을 수 있었어요."

-14좌 여성 최초 완등으로 방송 신문 등 매스컴의 관심이 대단했습니다. 등정에 부담이 되진 않았는지요.

"제가 그런 것을 잘해요.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고 구분하는 거요. 약간의 부담 있었지만 제 마음을 잘 컨트롤해 편안히 생각했어요. 저의 주목적은 오로지 등반이고 그것만 생각했어요."

-정상등반 생중계는 처음이었습니다. 국민들은 방송을 통해 정상 등정의 현장을 목격하고 함께 감격했습니다. 하지만 카메라맨도 올라가는 정상 등정이 과연 의미 있는 도전일 수 있느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카메라맨이 대단한 것이다 생각해야죠. 그 분은 히말라야가 처음이 아니에요. 10년 전부터 경험을 쌓아오신 분이에요. 저와는 2009년 카첸중가 때부터 계속 같이 등반했고 마지막 캠프까진 언제나 같이 갔었어요. 보통의 경력이 아닙니다. 정상에 카메라 가지고 올라가는 것은 그분의 꿈이기도 했고요."

-14좌를 완성했으니 이제 요즘 주목 받고 있는 알파인스타일로 도전할 용의는 없으신지요.

"아이고 제 나이가 있습니다. 그걸 아셔야죠. 스텝 바이 스텝. 한꺼번에 뛰어넘을 수는 없어요. 8,000m급 14개를 한 남자 분이 전세계에 20명이 있어요. 하지만 1986년 메스너 이후 메스너 만큼의 극한의 등반을 하신 분 얘기 들은 적 없어요. 아주 오래 전 히말라야 등반 스타일은 전통 극지법을 썼어요. 대량 물량공세로 이루어진 원정이었습니다.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데 한 달이 걸렸지요. 지금은 세월이 변했고 시대가 변했어요. 교통수단을 최대한 이용하다 보니 기간도 짧아졌어요. 짧은 기간에 2, 3봉을 연달아 등반할 수 있는 여건이 된 것이죠.

네팔에서 독일의 슈피겔지와 인터뷰할 때 그 기자가 놀라워한 것은 '어떻게 인간이 15개월 만에 8개 봉을 등정하느냐'였어요. 그들의 포인트는 거기에 맞춰져 있었어요. 우리처럼 헬기를 썼네 안썼네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한텐 무척 신선한 질문이었습니다."

-매스컴의 요란한 동행과 듬직한 스폰서 등 상업주의 등반에 대한 비판도 많은데요.

"그것 역시 그분들의 의견입니다. 알프스의 몽블랑 마테호른 초등도 다 상금을 걸었던 이벤트였고 그래서 초등이 됐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상업주의 등반'이라고 하는데요. 스포츠 선수들에 스폰서 붙는 거는 괜찮고 목숨 걸고 가는 산악인들에겐 왜 안 되는 건지요. 수천만, 수억원이 필요한 등반비용을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으면 당연히 스폰서에 의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14좌 성공할 때마다 계속 홀리 여사를 만났나요.

"(손을 흔들며)아니죠. 93년 에베레스트에 도전 했을 때 그 분의 명성을 처음 들었어요. 2008년 가을 마나슬루 이후 처음 뵙게 돼 너무나 영광스러웠어요. 제 인터뷰 직접 해주셨다는 것 자체가 영광인데 그분이 날 만나고 싶어했다는 말 들었을 때 더 기뻤어요. 이번엔 파사반 팀에서 이야기가 있어 서로 만나야 되는 상황이었죠. 의혹 제기한 것 하나하나 풀어주고 며칠에 걸쳐 증거자료 제출했더니 참고자료를 성의 있게 보내 줘 고맙다고 전해왔어요. 카트만두를 떠나기 전날 또 한번 뵙는데 그때 홀리 여사가 칸첸중가 초등 당시의 상황을 예로 들어주더군요. 산 아래 주민들이 정상을 밟지 않기를 바라자 당시 등정에 나섰던 이들은 정상 10m 전까지만 다녀왔다고요.

-고미영씨 사진을 품고 올라갔는데요. 묻고 올 줄 알았는데 그냥 내려오셨어요.

"(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묻으려 가지고 올라갔는데 가 보니 너무 추워요. 그 얘기 할 때마다 가슴이 아픈데 진짜 추워요. 어떻게 거기다 놔둬요. 그래서 같이 내려왔어요. 그 사진을 여성산악회에 보낼지 유가족에 보낼지 선배들과 상의해 결정하려고 해요. 네팔 사원에 모시려고도 했는데 당시 카트만두는 파업 여파로 차가 아예 다니지도 않아서 가지고 들어왔어요. 지금도 제 가방에 있어요."

-보통사람의 체력이 아니라고 하는데요.

"일반 학생들과 다르지 않았어요. 8,000m급 다니며 처음에 저도 무척 힘들었어요.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요. 93년 에베레스트 다녀온 후 비교적 고소적응을 잘 한 줄 알았어요. 그때 쓴 메모를 나중에 우연히 봤어요. 헌데 맨날 머리 아프고 낑낑거리고 입맛 없다는 이야기만 적혀있더라고요."

-해발 8,000m 무산소 등반은 몸에 심각한 손상을 끼칠 수 있는데요. 2개 봉우리 빼곤 다 무산소로 올랐어요.

"2개 봉 할 때만 해도 14좌를 목표로 하지 않았어요.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 산소 안 쓰면 다 죽는 줄 알았어요. 당시에도 무산소는 아주 극소수로 2, 3명만 해냈어요. 2007년 K2 하면서 8,500m부터 산소 마스크 빼고 정상에 섰어요. 당시 인터넷 생중계를 했는데요. 정상에서 제가 직접 넷북 켜고 카메라 위성전화기 연결하고 프로그램을 돌렸어요. 정말 축복받은 날이었죠. 바람 한 점 없었고 햇볕도 따뜻했어요. 무산소로 있다 내려오니 괜찮더군요. 그때 '아 앞으로도 안 써도 되겠구나' 생각했죠. 산소를 쓰려면 보통 산소통 2통이 필요한데 한 통은 셰르파에 맡겨야 해요. 셰르파 의존도가 더 높아지는 겁니다."

-원정엔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드는지요.

"정말 미니 머니만 들고 갔어요. 함께 가는 방송팀은 방송국에서 부담하는 거에요. 제가 지원받는 것은 봉우리 하나 당 2,500만원이에요(다른 원정대가 보통 1, 2억원씩 후원 받는 것에 비해 너무 적어 깜짝 놀랐다). 그 돈으로 셰르파나 산소통을 얼마나 쓸 수 있겠어요. 대부분 동료 대원 없이 혼자 올라갔어요. 셰르파는 상황에 따라 한 명, 두 명 혹은 아예 없었어요. 로체는 정말 아무도 없이 저 혼자 올랐어요."

-동료 대원과 함께 오른 적은 없었나요.

"후배랑 함께 등반한 적 있었죠. 아마다블람 때 9명 정도 데려갔고 거기서 발굴한 친구와 초오유, K2도 갔었죠. 히말라야는 잘 갖춰진 곳이 아니에요. 같이 지내기엔 이성보다는 동성이 편했죠. 김선애란 친구를 파트너로 키워보려 했는데 K2 다녀와 시집을 갔어요. 여자는 결혼과 육아에 발이 묶여 쉽지 않아요.

초오유때 정말 돈이 없었어요. 그 친구 학교서 절반 도와주고 제가 절반 내고 올랐어요. 아무도 고용 못했어요. 셰르파는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밥 해줄 쿡도, 심부름할 키친보이도 없었어요. 그야말로 단 둘이 초오유에 올라간 거에요. 그렇게도 올라갔는데 지금의 화려한 모습만 보고 저게 뭐냐 그러면 진짜 할말 없어요. 사실 이 화려함도 정말 소박한 화려함인데요."

-끝으로 더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일보는 한국인으론 처음 에베레스트를 오른 77원정대도 공식 후원했고 한국의 산악문화 발전에 많이 이바지한 언론으로 알고 있어요. 저를 포함해 많은 산악인들이 친근하게 느끼고 있는 신문이에요. 산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과 오은선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과 함께 한국瞿?독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 프로필

1966년 전북 남원시 출생. 1남 2녀 중 장녀

86년 수원대 입학 산악부 가입

93년 에베레스트 여성원정대 참여

2006년 7대륙 최고봉 한국 여성 최초 등정

2008~2009년 여성 산악인 최초 한해 연속 8,000m급 4개봉 무산소 등정

2010년 안나푸르나 성공으로 세계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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