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ㆍ김수진 옮김 / 시공사 발행ㆍ352쪽ㆍ1만2,000원
은퇴한 사진작가 안드레스 파울케스는 지중해 해안가 절벽에 버려진 망루를 사들여 그 내벽에 거대한 전쟁화를 그린다. 종군기자로 세계를 누비며 전쟁의 비극을 찰나에 포착한 사진으로 명성을 얻은 그였지만, 지금은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오직 벽화에만 몰두한다. 그런 어느 날 한 남자가 그를 찾아온다. 파울케스를 찾아 10여 년을 헤맸다는 남자는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당신을 죽이려고요."
이보 마르코비츠라는 이름의 남자는 파울케스의 카메라에 찍혀 유명 잡지의 표지 모델이 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세르비아군에 맞서 크로아티아 민병대에 참가했다가 도주 중이던 패잔병이었다. 그 사진은 파울케스에겐 수상 경력을 더해줬지만, 마르코비츠에겐 재앙이었다.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은 잡지를 보고 그를 쫓던 세르비아군에게 참담한 죽음을 당했다. 그 비극을 자기 책임으로 여기지 않는 파울케스에게 그는 말한다. "당신은 그걸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악을 사진으로 남기는 삶도 그 악의 일부라는 걸."(64쪽)
해박한 지식과 정교한 구성의 소설로 '스페인의 움베르토 에코'로 불리는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59ㆍ사진)가 2006년 발표한 장편이다. 이 소설은 등 줄거리가 뚜렷하고 역동적인 레베르테의 전작들과는 사뭇 다르다. 시종 악연을 맺은 두 남자만 등장하는 이 소설은 이들의 대화와 상념으로 전개된다.
이들의 화제는 문제의 사진과 파울케스의 벽화. 상대에 의해 언제라도 죽음을 당할 수 있는 긴장된 상황에서 이들이 벌이는 입씨름은 '전쟁의 비극은 누가 얼마만큼 책임져야 하는가' '예술은 과연 진실을 구현할 수 있는가'라는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심도있는 토론이다. 이들에겐 또 하나의 중요한 화제가 있다. 두 사람이 만났던 바로 그 전쟁터에서 죽은 파울케스의 연인이자 동료 기자인 올비도. 지뢰를 밟고 절명한 올비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던 파울케스와 그런 연인의 모습을 목격한 마르코비츠, 두 사람의 대화는 예술가의 윤리 문제로 폭을 넓혀간다. 고급 심리극을 보는 듯한 긴장과 지적 유희를 선사하는 소설이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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