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 지방선거 후보자 등록이 끝났다. 정치하려는 사람이 참 많다고 새삼스럽게 놀랄 만한 숫자다. 교육감ㆍ교육의원 선거까지 겹쳐서, 지방 소도시에서는 한 집 걸러 한 명이 후보자라는 말이 나온다.
그 많은 후보자들이 쏟아내는 출마의 변을 들으며 궁금한 게 있다. 각양각색의 후보자들이 한결같이 그럴 듯한 정책과 공약을 밝히고, 지역과 주민, 국가와 사회를 위한 헌신을 다짐하지만 출마의 진정한 동기,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게 만든 강력한 욕구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이 대답을 후보자들에게서 직접 들을 수는 없다. 내놓고 말하기 쑥스럽기도 하고,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경우도 많다. 선거 이후의 행동을 관찰해 통계적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미국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1940년대에 밝힌 '욕구 위계설'은 지금도 회자되는 고전적 모델이다. 인간 욕구의 가장 낮은 단계를 생리적(Physiological) 욕구로 보고, 그 위에 안전(Safety), 귀속(Belongingness), 존경(Esteem),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의 욕구를 차례대로 올려 놓았다. 여러 욕구가 한꺼번에 작용할 수 있지만 어차피 '지배적'욕구가 있게 마련이고, 낮은 단계의 욕구가 충족돼야 다음 단계의 욕구 충족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지방정치의 저급한 동기
대개의 인간 행동은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 5단계에서 따로 떨어진 지적ㆍ미적 욕구까지 합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정치적 욕구'에는 특정 단계 적용이 쉽지 않다. 크든 작든 권력을 향한 욕구는 사회적 자원의 배분에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몫을 늘리자는, '더 먹자'욕구를 깔고 있지만, 그것이 기초적 의식주 해결을 위한 생리적 욕구일 수는 없다. 질병과 고통, 범죄로부터의 보호를 뜻하는 안전 욕구도 아니다. 애정과 관심, 소통을 바라는 귀속 욕구, 자기존중과 사회적 존경을 포함한 존경의 욕구와 가까울 수 있지만 정치인에 대한 사랑이나 존경을 찾아볼 수 없는 한국에서는 답이 아니다.
선거 승패와 무관하게 좀처럼 판을 떠나지 않는, 마치 그것이 유일한 자아실현의 길인 것처럼 여기는 당사자들의 태도로 보아서는 5단계의 '자기실현 욕구'가 뒤틀린 형태가 엿보이지만 3ㆍ4단계의 욕구도 채우지 못한 한국정치에서는 상정하기 어렵다.
한국의 정치 욕구는 이런 고전적 틀보다 현실의 이해동기로 살피는 게 알기 쉽다. 현실의 정치욕구는 '먹자'와 '지키자', '펼치자'세 가지에서 비롯한다. 더 많은 정치ㆍ사회ㆍ경제적 이익을 얻자는 '먹자'와 최소한 현재의 이익을 유지하자는 '지키자'는 특히 지방정치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선거 승리를 새로운 이권을 챙기거나 기존의 이권을 지키는 수단으로 여기는 후보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지방정치를 얼룩지게 한 숱한 부정비리 사례로써 입증됐다. 더러 경제적 실익과 무관한 후보자가 있더라도 정치적 상승의 발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역시 '먹자''지키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유권자 소명의식 가져야
이런 동기는 기초에서 광역으로, 지방의회에서 단체장으로 갈수록 묽어진다. 대신 자신의 뜻에 남이 따르게 하려는 권력의지 본연의 '펼치자' 동기가 짙어진다. 국회의원을 지나 대통령 선거에 이르면 이미 '먹자'와 '지키자'는 저절로 따라오고, '펼치자'가 지배적 동기가 된다. 이 '펼치자'야 말로 헌신이나 봉사로 포장할 수 있는, 최고의 명분이기도 하다.
선거와 지역ㆍ주민의 밀착도가 높은 소규모 지방정치로 갈수록 지역 발전을 위한 뜻을 펼치는 후보가 많아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다. 지방정치의 이런 구조적 문제는 결국 게으른 유권자 탓이다. 투표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대강 정당만 보고 찍어버리니 후보자들이 유권자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 최소한 '먹으러', '지키러' 출마한 후보는 걸러내겠다는 유권자들 나름의 소명의식이 그래서 절실하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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