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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 민주화운동 30주년/ 당시 동참 호소 방송했던 박영순씨 "진상규명 바로서면 자랑스럽게 광주 찾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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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 민주화운동 30주년/ 당시 동참 호소 방송했던 박영순씨 "진상규명 바로서면 자랑스럽게 광주 찾을 것"

입력
2010.05.1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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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ㆍ18민주화운동 마지막 날인 5월 27일 새벽 2시께 광주 충장로 구 전남도청 방송실."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학생들이 총칼에 숨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박영순(52) 목포시교육청 유아순회교사는 죽음의 공포에 떨며 애절한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광주 시민들이 얼굴은 몰라도 목소리는 다 알았다는 5ㆍ18 스타 박씨를 수소문 끝에 12일 거주지인 전남 목포시에서 만났다. 당연히 30년의 삶이 궁금했다.

그는 5ㆍ18이 끝난 직후 체포돼 간첩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최종심에서 징역15년으로 형량이 줄었다. 그리고 1980년 12월 말 크리스마스 특사로 7개월 만에 풀려났다.

박 교사는 광주가 무서웠다. 아니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석방 직후 무조건 광주를 떠났다. "책임자가 훈장받고, 피해자가 고통받는 등 현실이 미워 그냥 광주는 돌아보지도 않기로 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후 그는 20년 동안 영남에서 살았다. 그러나 풀려나 영남으로 옮긴 후에도 박 교사는 사실상의 감옥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10여년 동안 철저한 감시를 받아 온 것이다.

그를 버틸 수 있게 했던 것이 83년 결혼한 남편이었다. 모두가 버린 그를 남편은 따뜻하게 품어 줬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남편이 직업군인(해군)이라는 점. 박 교사는 남편이 그리도 좋은지 "광주의 그 군인과 이 군인은 다르다"고 웃어 가며 말했다.

또 한가지 그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있다. 2008년 목포시로 이사한 후 6년 만에 평생의 꿈이었지만 군사 정권 시절 꿈도 꿀 수 없었던 교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80년엔 도대체 왜 나섰냐'는 질문에 그는 "피가 끓어 버렸다"고 했다. 그는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한 뒤 여고생들에게 가야금 등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비슷한 또래의 여고생들이 군인들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바로 시민군에 합류했다고 했다.

아들(28)에게 민주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 광주로 대학을 보냈지만 자신은 가급적 광주행을 피한다. 그는 "명예 회복이 됐다지만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은 아직 이뤄지지 않아 희생자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이유를 털어놓았다.

목포=박경우기자 gw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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