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같이 나른한 봄날 내가 즐겨보는 영화 가운데 '카모메식당'이 있다. '카모메'는 갈매기라는 뜻이다. 카모메를 붙인 식당은 그 이름부터 하얀 갈매기 같이 깨끗한 느낌을 준다. 어디로든 훌쩍 날아가 조용하게 내려앉았을 것만 같은 갈매기 식당은 잔잔하고 깨끗하지만 어쩐지 외로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 속 '갈매기식당'은 어느 날 핀란드에 날아온 동양 여자가 홀로 운영한다. 왜 왔을까, 왜 혼자일까, 왜 하필 핀란드였을까, 하는 가벼운 궁금증도 잠시, 영화 속 등장하는 그녀의 단아한 일상과 식당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먹을거리들이 눈과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영화 중반부, 관객이 여주인공의 '사연'에 대해 그다지 궁금해 하지 않을 시점에서 주인공은 잠깐 입을 연다. '오니기리'라 부르는 일본식 주먹밥을 만들어 먹으며 자신의 어린시절을 이야기 한다. 어린시절 먹었던 주먹밥은 한 입 배어 물 때마다 언제고 다시, 그녀를 그 시절로 되돌려 놓는 마법의 음식인 것이다. '소울푸드(soul food)'는 영혼이 담긴, 그러니까 '끼니' 그 이상의 의미가 담긴 음식이다.
'당신의 '소울푸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각 분야의 문화인들은 다음과 같이 답해주었다.
디자이너 장광효의 소울푸드는 굴밥. 어릴 적 몸이 축날 때마다 어머님이 해주시던 따뜻한 굴밥의 바다내음이 마음의 평화를 찾아주곤 했었단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지치고 힘들 때마다 굴밥을 찾는다. 뮤지션 싸이(박재상)는 '집 밥'이라 답하고는 그 가운데 콕 집어 '엄마가 끓여 준 온반(양지머리 국물로 만든 이북식 국밥)'이라 말한다.
출판사 '그책'의 정상준 대표는 '열차집 빈대떡'을 이야기 한다. "학생 때부터 광화문 교보문고에 책을 사러 가면 꼭 들러 빈대떡을 먹고 왔어요. 돌이켜 보면, 책을 사러 간 김에 빈대떡을 먹은 것이 아니라 빈대떡이 생각나면 구실삼아 서점으로 향했던 것 같아요."
배우 김민정의 소울푸드는 '청국장'이다. 아역배우 출신으로 이미 어린 시절부터 불규칙한 스케줄을 감당해야 했던 그녀의 지친 위장을 달래준 '건강친구'라고. 엄마가 끓여준 청국장이 여전히 최고의 보약이고 옛 기억이 절절하게 만드는 메뉴라고 여배우는 말한다.
작은 밥공기로부터 할리우드 스타들의 러브콜을 받는 인테리어 오브제까지 작품의 영역이 넓은 도예가 이헌정에게는 '도가니탕'이 소울푸드다. 오래 전 유학시절, 사람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는 그가 홀로 생활하면서 향수병을 이길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친구는 가끔씩 용돈을 털어 자신에게 큰 선물하듯 사먹은 근처 한인식당의 도가니탕이었다 한다.
월간지 '헤렌'의 김세진 편집장은 여고생 시절부터 엄마가 원기를 돋우려 끓여 주시던 '게찌개'를, 박여숙갤러리의 박여숙 대표 역시 엄마가 된장 넣고 끓여 주시던 '우거지'를 떠올리며 소울푸드라 했다.
나의 소울푸드는 우래옥의 냉면이다. 평안도 출신인 내 할아버지는 '구두쇠'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외식을 싫어했지만, 집안에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온 가족을 이끌고 우래옥 냉면을 먹으러 갔다. 어릴 적 내 입맛에는 그저 밍밍하고 투박했던 그 면과 육수의 진 맛이 30년 지난 지금에야 이해된다. 나에게 메밀면을 먹는 날이란 늘 좋은 날이었다. 그러니 지금도 우래옥 냉면을 먹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기운이 난다.
누구에게나 음식 그 이상의 의미를 담은 소울푸드가 있다. 한 입씩 먹을 때마다 과거로 돌아가기도, 과거의 누군가가 되살아나 내 앞에 앉아있기도 하게 만드는 요상한 음식이 소울푸드다.
박재은 푸드칼럼니스트 eatgamsa@gmail.com
■ '엄마의 밥'을 기억은 맛있다 말하죠
우리는 가장 편한 상태에서 편히 먹고 소화가 편히 이루어진 식사를 '맛있다'고 기억하는 것 같다.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또 가장 감정을 움직이는 식단을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 밥', '엄마 밥' 혹은 내 집 드나들 듯 자주 먹던 익숙한 무언가를 이야기 한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해 준 밥, 엄마가 끓여 준 국, 엄마가 끓여 준 청국장, 엄마나 다름없던 학교 앞 식당 아주머니의 도가니탕 등이 몇 십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기억나는 것이리라. 사람은 제가 나고 자란 땅의 음식을 먹었을 때 영양적으로 보충되는 것 이상의 안도를 느낀다. 외국에 다녀와서 가장 먼저 김치찌개를 먹을 때,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 집 된장으로 끓인 강장에 텃밭에서 뽑은 채소를 곁들여 입이 터져라 먹을 때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듯 마음의 갈증이 풀린다.
엄마 밥은 유기농 재료로 만든 거창한 요리가 아니다. 엄마들은 냉장고에 있던 호박이며 양파 끄트머리, 된장이나 간장, 여기에 실파를 쫑쫑 썰어 넣고 몇 번이고 간을 본다. 신식 주부들처럼 '위생'을 생각해 간 보는 숟가락을 따로 구별하지도 않는다.
엄마처럼, 엄마나 다름없는 오랜 맛집의 어르신처럼 그저 한 그릇 따끈하게 먹고 어서 힘을 내라는 마음이 담긴 음식이 사람을 살린다. 국물을 타고, 빈대떡 온기를 타고 그 마음이 내게 들어와 저 외로운 세상으로 다시 한 번 나가보자는 용기를 다지게 한다.
박재은 푸드칼럼니스트 eatgams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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