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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게으른 지도자가 좋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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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게으른 지도자가 좋다니

입력
2010.05.12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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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후보들이 여기저기 자신을 알리는 펼침막을 걸어놓았다. 대개가 ‘000의 일꾼’, ‘소처럼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밤낮으로 뛰겠습니다’ 처럼 부지런함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그걸 보면서 한참 전에 유행했던 우스개 소리가 생각나서 혼자 웃음을 지었다. 직장 상사를 네 유형으로 나누어 누가 제일 바람직한가를 알아맞히는 유머였다. 1. 머리 좋고 부지런한 상사 2. 머리는 좋으나 게으른 상사 3. 머리는 나쁘지만 부지런한 상사 4. 머리도 나쁘고 게으르기까지 한 상사.

직장인들이 뽑은 제일 바람직한 상사는 1번이 아니라 2번이다. 최악의 상사 역시 4번이 아니라 3번이다. ‘머리는 좋으나 게으른 상사’가 첫째 자리에 온 것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그런 상사는 상황을 잘 파악하고 머릿속에 큰 그림을 그릴 줄 알기에 소소한 일은 부하 직원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여유를 준다. 괜히 부지런 떨면서 아랫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아래로부터 아이디어가 올라올 수 있게 해준다. 그에 비해 최악으로 꼽힌 ‘머리가 나쁘면서 부지런하기까지 한 상사’는 엉뚱한 일만 계속 저지르고, 괜히 새벽부터 나와서 우왕좌왕하고, 소소한 일까지 일일이 참견하면서 부하 직원을 괴롭힌다.

두 번째 자리는 흥미롭게도 1번이 아니라 4번이 차지했다. ‘머리 나쁘고 게으르기까지 한 상사’는 일을 많이 벌이지 않고, 참견도 별로 안하고, 일도 열심히 하지 않기에 부하들이 알아서 스스로 일을 처리하면 된다. 그러나 ‘머리 좋고 부지런한 상사’는 온갖 일을 다 벌이고, 늘 앞장서서 들들 볶는 바람에 부하 직원들은 숨 돌릴 틈도 아이디어를 낼 여유도 없이 헉헉대며 따라가기 바쁘다.

21세기는 아이디어와 창의력의 시대이다. 지도자가 불도저 식으로 밀어붙이면서 앞장서 나가면 나머지는 그를 따르면 되었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런 방식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시대나 산업화 초기에나 어울린다. 그때는 소품종 대량생산과 상명하복, 일사분란함이 덕목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하고 상품의 회전주기가 빨라지고 엄청난 정보가 넘쳐나는 탈산업화 시대에는 더 이상 그런 가치가 통하지 않는다. 다품종 소량생산시대에 새로운 상품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부지런한 지도자가 아니라 수많은 인재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필수적이다.

이 새로운 시대에는 똑똑하지만 게으른 상사가 적합하다. 저 혼자 앞장서서 온갖 것을 다 지시하고 참견하고 점검까지 하는 대신 큰 방향만 정해주고 그 내용은 부하직원들이 스스로의 아이디어로 채워나가도록 북돋아주기 때문이다. 그래야 창의력과 상상력이 발휘되고 새로운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상상력은 정신없이 바쁜 와중이 아니라 빈둥거리거나 어슬렁거릴 때 극대화된다. 창의력을 중시하는 구글 같은 회사가 직장을 놀이터나 문화공간처럼 꾸며놓고 직원들이 놀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놀도록 적극 장려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똑똑하나 게으른 이들이 많이 당선되었으면 좋겠다. 지방정부에서부터 창의적이고 여유로운 풍토가 슬슬 생겨나 전국으로 퍼지기를 기대해 본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의 지금 대통령은 몇 번째 유형에 속할까? 잠을 적게 자고 새벽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니 부지런한 것은 틀림없다. 문제는 1번이냐 3번이냐 인데 그건 잘 모르겠다. 3번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 당사자는 물론 국민 모두가 참 피곤하고 짜증날 테니 말이다.

김용민 연세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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