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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16> 상상의 힘-도시 속의 오아시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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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16> 상상의 힘-도시 속의 오아시스 이야기

입력
2010.05.11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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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제게 묻습니다. 당신의 상상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당신의 연출가적 리듬과 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러면 저는 일단 시적(詩的)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시를 쓰지 못하면 연극을 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시적(詩的)이란 의미는 시를 짓기 이전의 정서적 상태를 말합니다. 시적 공간은 현실 저 너머의 세계이거나 현실의 속내에 자리 잡는 인간의 상상력입니다. 현실은 항상 우리에게 결핍과 존재의 불안감을 자극합니다. 그러면서도 매일 단순 반복되는 지루한 타임 테이블입니다. 삶의 결핍을 메우는 것이 시적 상상력이고, 삶의 지루한 단순 반복을 무너뜨리는 것이 극적(劇的) 행위입니다. 그래서 연극은 삶의 결핍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극적 행위입니다.

당신의 그런 생각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저는 궁핍했던 20대의 '오아시스' 시절을 떠올립니다. 오아시스는 부산 국제시장 모서리에 자리잡고 있었던 고전음악다방 이름입니다. 주인이 선원이었는데 배를 타고 들어 올 때마다 새 음반을 가져 왔습니다. 당시 국내에 수입 금지되었던 러시아의 쇼스타코비치 심포니 5번 같은 것도 들을 수 있는 곳이었지요. 80원 하는 커피 한잔 값만 내면 온종일 죽치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모이는 사람들은 요샛말로 청년 백수들이지요. 그러나 백수라고 다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천박하고 비루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폐증 환자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세속적인 삶을 거부한 아웃사이더를 자처했습니다. 그들에게 삶의 무기는 책과 음악이었고, 유일한 노동은 저 혼자만의 사색과 상상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최소한 열 시간 이상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낡은 의자에 몸을 묻고 버틸 수 있는 자만이 단골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들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묻지도 않았고 통성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몇 달 이상 계속 들락거리는 단골들만 눈인사를 나누는 정도였지요. 밖은 떠들썩한 시장통인데, 다방 안은 음악에 묻힌 침묵만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1950년대 전란통에 문을 열었는데, 벽면과 천장에 보들레르의 시 '악의 꽃'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다방 실내를 부조로 장식한 젊은 조각가는 작업을 끝내고 자살했다는 전설을 남깁니다. 고전음악 다방에서의 자살극은 청년백수들이 벌이는 최후의 저항이었습니다. 1950년대 부산 스타다방에서 젊은 종군시인 전봉래는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점차 의식을 잃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글로 써내려 갑니다. 글씨가 점차 흐려지면서 그의 의식 또한 소멸되어 간 것이지요. 그가 마지막으로 들은 음악은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었다고 유서에 적혀 있습니다. 저희 청년백수 오아시스 족들은 전봉래 시인의 죽음을 순교라고 불렀지요. 그래서 그런지 고전음악을 들려주는 음악실과 다방에서의 자살극은 70년대 말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집니다. 부산의 오아시스, 고전, 칸타빌레, 대구의 하이마트, 마산 진해의 흑백다방, 서울 명동의 필하모니…. 청년백수들의 자살극은 주로 마지막 글쓰기와 음악 감상으로 끝납니다.

자살자들이 가장 많이 신청한 음악은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도대체 바하의 무미건조한 음악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택한 마지막 신청곡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이라고 쓴 유서는 도화지 여섯 장 분량의 연애편지였고, 수면제 서른 알 삼키고 뒷골이 뻣뻣해질 때 스트라빈스키의 싱싱한 팀파니 음이 상상의 들녘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침 저를 만나러 온 친구 때문에 자살극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맙니다. 죽지 못해 부끄러웠는데, 더욱 저를 부끄럽게 한 것은 제가 보낸 연애편지에 답장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답장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엽서로 왔고, 이대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답신은 아주 짧았습니다.

"귀하가 보낸 불순한 편지가 학과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으니,

이런 유치한 편지질은 삼가시기 바람."

저는 그만 조용해졌습니다. 저의 순교적 글쓰기가 불순하고 유치하게 해석되는 마당에 무슨 할 말이 남아 있겠습니까. 그때부터 저는 말을 잃고 깊은 어둠 속에 잠복합니다. 이제 절대 죽지 않으리라. 언젠가 이 못난 나 자신에 대해 복수하리라.

저는 낡은 고전음악다방 오아시스가 문을 닫을 때까지 5년 동안 죽치면서 김현의 평론집 을 밑줄 그어가면서 읽습니다. 이청준의 중편소설 과 을 읽으면 그 당시의 데카탕스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 의 '왕' 같은 인물을 동일시의 대상으로 숭배합니다. 아, 이때 체홉의 희곡도 읽습니다. 체홉의 을 읽으며 지주의 벚나무를 도끼로 쳐서 무너뜨리는 농노의 아들 로빠힌 역을 꿈꿉니다. 러시아 작가 고골리의 중편소설 는 제게 결정적인 상상의 힘을 제공합니다. 평생 모은 돈으로 구입한 루비시카 외투를 어이없이 탈취당하고 울화통이 터져 죽은 남자. 그가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고골리는 엄청나게 큰 주먹을 지닌 귀신을 등장시킵니다. 그리하여 값 비싼 루비시카 외투를 입고 으스대는 사람 앞에 나타나 그 큰 주먹을 들이대고 말하는 것입니다. "벗어!"

저는 이 대목에서 오랜만에 박장대소 합니다. 그러면서 벌떡 일어섭니다.

"그래, 이 세상에 큰 주먹을 들이대는 귀신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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