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번쩍 뜨였다. 오래도록 웅크리고 있던 사자의 포효를 보는 듯했다.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은 박중훈의 매력과 존재감을 스크린에 새삼 돋을새김 한다.
눈을 부라리며 욕설을 내뱉을 땐 영락 없는 깡패이면서도 동네 합기도 도장 사범들에게 쥐어터질 땐 정말 깡패 맞나 싶은 삼류 조폭 동철. 박중훈(44)은 근무복이자 생활복인 트레이닝복을 입은 꾸부정한 몸으로 변두리의 풍경과도 같은 깡패를 실감나게 그려낸다. 그의 몸을 빌어 동철은 다가서기 꺼려지면서도 안면 트면 언제든 소주잔을 기울일 수 있을 듯한 묘한 정감의 사나이로 변신한다. 특히 잔뜩 구겨진 얼굴로 유머를 발산하는 박중훈의 연기는 웃기면서도 가슴 짠한 영화의 무게중심을 절묘하게 잡는다. 누가 "박중훈이 예전 같지 않다"고 했는가.
10일 오후 서울 태평로 한 카페에서 만난 박중훈은 "루저(사회적 낙오자) 연기가 편하다"고 했다. "2000년대 들어 내 연기의 문제점은 윤택한 생활에서 비롯된 윤택한 느낌"이라며 "나를 '훈제'시킬 필요가 있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제대로 된 '훈제'를 위해 영화 촬영 기간 사람들을 안 만났다고 했다. 휴대폰 전원을 꺼놓고선 며칠 동안 확인도 하지 않았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영화계에 20년 넘게 있으니 인간관계가 너무 많아 집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깡패 같은 애인' 촬영이 끝나기 무섭게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 촬영이 이어졌다. 그는 "지난 9월부터 8개월 가량 섬에 사는 듯한 처절한 외로움을 느끼면서 살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1986년 '깜보'로 데뷔한지 어느덧 24년이 흘렀다. 그는 "사반세기나 연기를 해오니 어두운 면도 있지만 내 스스로 역사를 써내려 간다는 긍정적인 면이 더 크다"고 말했다. "관리 잘해서 배우 생활 잘하면 환갑 돼서 40년을 맞을 수 있으니 훨씬 좋은 것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대중에게 외모로 신선함을 주기엔 불리한 배우"다. "박중훈의 호흡은 관객들이 다 알기에 섣부른 기교를 부리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영화에서 사실성과 진심이라는 정공법을 택했다"고 말했다. "결국 관객들이 나의 갈 길을 제시해줬다"고 그는 평가했다. 그가 데뷔하기 직전인 1983년 태어난 정유미와의 로맨스 연기에 대해선 "거리낌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배우는 나이가 없고, 나는 젊게 산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영화도, 인생도 이 길이 아니면 저 길을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고 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되 최선의 상황이 다가오지 않으면 차선을 최선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고도 말했다. 한때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며 야망을 불태웠던 배우치고는 소박해 보이는 인생관. 그는 "예전엔 최선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으면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덜 안달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마흔을 전후로 인생을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훌륭한 운동선수는 질 때 대처하는 법을 잘 압니다. 오래도록 꿈꿔온 '박중훈쇼'가 막을 내렸을 때도 현실로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하더군요. 저를 원하는 작품들이 연달아 기다려주고 그 작품들이 관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게 배우로서 최선의 꿈입니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배우인생을 살고 싶은 거죠."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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