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강제병합 100년인 올해, 일제강점기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매년 봄, 가을 두차례 딱 2주일씩만 문을 열고 뛰어난 우리 문화재들을 소개해온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도 이번 봄에는 망국의 아픈 기억을 더듬는다. 16일부터 30일까지 여는 '조선망국백주년추념회화전'을 통해서다.
한일 강제병합으로 조선이 역사를 다한 1910년 당시 환갑이었던 서병건(1850~?)과 이창현(1850~1921)부터 24세였던 고희동(1886~1965)까지, 화가 28명의 작품 100여 점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짚어보는 전시다.
이때의 그림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갈팡질팡'이다. 나라를 빼앗긴 화가들은 예술의 갈 곳까지 잃어버린 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혼란과 갈등, 고뇌와 절망, 단절과 모색, 은둔과 참여 등 망국의 복잡한 상황들이 고스란히 그림에 나타난다.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었던 심전 안중식(1861~1919)과 소림 조석진(1853~1920)은 자신들의 전통 기법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이들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도화서가 폐지되면서 생업을 잃자 1901년 후진양성소인 경묵당을 만들어 이도영(1884~1933), 고희동 등을 배출한 데 이어 1911년 조선서화미술회를 설립해 제자를 키웠다.
그러나 이들이 고수한 기법은 한국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장승업(1843~1897)으로부터 비롯된 중국 장식화풍이었다. 비록 전통 계승의 의지와 항일의식까지 뚜렷이 갖고 있었지만 기법상으로는 과거의 답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심전과 소림의 전통 기법은 이도영에게서 그 맥이 끊어지고, 이들의 제자 중 일본 유학에서 배운 서양화 기법을 수용한 고희동이 새로운 근대 동양화의 흐름을 이끌게 된다.
직업 화가가 아닌 이들의 경우 각자 걸었던 삶의 방향에 따라 화풍도 달리했다. 일본에서 살 길을 찾은 이들의 그림에서는 자연스레 일본 회화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토 히로부미의 측근이었던 황철(1864~1930)을 비롯해 조선총독부 검사를 지낸 김돈희(1871~1936), 조동윤(1871~1923)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중국에서 미술을 배운 김규진(1868~1933) 등의 그림은 중국풍을 그대로 따랐다.
의병 활동으로 수감됐던 김진우(1883~1950)는 무기를 연상시킬 만큼 날카로운 난과 대나무 그림으로 항일 의지를 표현했다. 순조의 외손자 윤용구(1853~1939)나 지운영(1852~1935)처럼 암울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둔하며 그림으로 망국의 울분을 달랜 이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추사의 문인화풍을 계승한 민영익(1860~1914)은 '운미란(云楣蘭)'이라 불리는 독특한 묵란화를 개척하기도 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연구소 실장은 "회화는 한 시대의 문화 역량을 총체적으로 반영하기에 조선 망국기의 그림이 전체적으로 무기력하고 생동감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02)762-0442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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