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도를 낮춘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코 끝 가득 묵향이 번진다. 가로 4m 세로 18m의 커다란 수조 속에 먹물이 조용히 물결치고 있고, 그 위 천장에는 서로 조금씩 길이가 다른 한지 수십 장이 일렬로 걸렸다. 검은 물 위에 한지의 그림자들이 일렁이고, 조금씩 흔들리는 백색의 한지와 전시장 벽에 물의 흐름이 반사되는 풍경은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8일 개막한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전에 나온 한국화가 김호득씨의 설치작 '흔들림, 문득_공간을 느끼다'이다. 김씨는 "먹과 한지를 분리하고 물결이 일어나도록 함으로써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김씨를 비롯한 우리 작가 11명이 참여한 이 전시는 이처럼 현대미술 작품 40여 점을 통해 시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흐르고, 번지고, 차고 기울고, 이어지는 시간의 속성을 '강' '물' '달' '끈'이라 이름붙인 네 가지 섹션에 담았다. 전통적 장르를 주로 선보였던 덕수궁미술관에서 오랜만에 수준높은 현대미술을 쉽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자리다. 역사성이 깃든 전시 공간도 시간이라는 주제와 잘 맞아떨어진다.
전시는 미술관 바깥 정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신미경씨가 비누로 만든 불상 조각들은 전시기간 내내 야외에서 바람과 비를 맞으며 시간에 의해 마모되는 과정을 몸으로 드러내게 된다.
한지에 염료가 스며드는 과정을 담은 한은선씨의 설치작 '물결치다'는 물처럼 번져나가는 시간의 속성을 보여준다. 벽면에 걸린 마지막 한 장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 작가가 수없이 반복했던 작업과정이 바닥에 길게 놓였다. 이진준씨의 영상작품 '불면증'은 창문에 내려진 블라인드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바람의 모습을 롱테이크로 촬영, 느리게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심리를 표현했다.
'달' 섹션은 고 백남준, 강익중씨의 2인전이다. 12개의 TV 모니터에 차고 이지러지는 달의 모습을 담은 백남준의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 그리고 365개의 패널에 365개의 달항아리를 그려넣은 강씨의 대형 설치작 '365 달항아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생성과 소멸, 순환과 반복이라는 개념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두 작품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끈' 섹션에서는 시간의 이어짐을 말한다. 휘어진 철사를 쌓아올려 독특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재미작가 존 배, 자신의 머리카락을 엮어 아름다운 샹들리에를 만든 함연주, 무수한 세필의 붓질을 반복해 꽃의 형상을 그려낸 김홍주 씨가 한 공간에 작품을 모았다. 모두 오랜 시간 동안 연결과 연결을 거듭해 완성한 작품이다.
이번 전시는 7월 4일까지 열린 뒤 8~10월 불가리아 국립외국미술관과 체코 국립현대미술관을 순회한다. 입장료 5,000원. (02)2188-6000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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