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가의 채권왕, 월가 저승사자들에게 한 방 먹이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의 공정성에 대한 물음표는 늘 있었다. 다만 딱히 대안이 없었을 뿐. 하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스탠다드앤푸어스(S&P)와 무디스 등이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이른바 'PIIGS'국가의 신용등급을 무더기로 낮춘 것이 유로존 재정 위기를 한층 심화시켰다는 '신평사 책임론'이 들끓는다.
'심판'이 뒷북 판정, 불공정 판정을 일삼으면서 경기 패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유로존 국가들이 "독자적으로 신용평가사를 설립하겠다"거나,"신평사들을 수술대에 올려 놓겠다"고 벼르는 것이 결코 으름장만은 아닌 상황이다. "뉴욕에 자리잡은 신평사 직원이 유럽 각국의 중앙은행보다 경제 상황을 더 잘 안다고 할 수 없다"(에발트 노보트니 오스트리아 중앙은행 총재)는 말은 유로존 국가들의 정서를 그대로 대변한다.
이런 논란에 기름을 부은 인물이 바로 '채권왕'으로 불리는 세계 최대 채권펀드회사 핌코의 빌 그로스 최고책임투자자(CIO). 그는 5일(현지시간) 핌코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신용평가사들은 최근 몇 년 동안 지적 능력도 상식도 보여주지 못했다"며 "그들의 신용 평가를 무시하라"고 일갈했다. 미국 월가의 채권황제가 유로존이 주도하는'반(反) 월가 신평사'대열에 전폭적인 힘을 실어준 셈이다.
신평사를 향한 그의 지적은 독설에 가깝다. 그는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를 빗대, "외모가 훌륭하다고 해서 그 가치가 정말로 높은 것은 아니다"며 "미스터 무디스와 미스터 푸어스가 화장과 하이힐, 문신을 통해 포장한 것일 뿐"이라고 신용평가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또 "신용평가사들은 미국 월가 금융기관이 전 세계 투자자에게 쓰레기를 팔아 넘기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며 "신용평가사들이 수수료 수입을 따내기 위해 최고 등급을 남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엔 국내 신용평가사도 "미국 평가업체가 발표하는 신용등급을 믿을 수 없다"며 아시아 10여개국에 대한 국가 신용등급을 자체적으로 매기겠다고 나선 상황. 남유럽 재정위기 사태를 계기로 미국 위주의 국제 신용평가 체제가 유례없는 도전을 받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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