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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물탱크 정류장' '내 삶'이란… 얼마나 허물어지기 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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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물탱크 정류장' '내 삶'이란… 얼마나 허물어지기 쉬운가

입력
2010.05.07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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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기수 지음 / 생각의나무 발행ㆍ240쪽ㆍ1만2,000원

서울 시내 옥탑방에서 여자친구와 동거하는 회사원 한세종은 옥상 한 켠에 자리한 물탱크의 뚜껑을 무심코 열었다가 깜짝 놀란다. 그 안에 한 사내가 침대에 이부자리, 읽을 책까지 살림방 구색을 갖춰놓고 들어앉아 있었기 때문.

처음엔 당장 쫓아낼 기세로 이 낯선 침입자에게 덤벼들던 세종은 뜻밖에도 사내가 없는 동안 안온한 물탱크 안에서 숙면을 취하는 일이 잦아진다. 그렇게 꽃잠에 들었다가 깬 어느날, 그는 자기 대신 옥탑방에서 여자친구와 동침하고 출퇴근하는 사내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소설가 태기수(42ㆍ사진)씨의 첫 장편 은 이처럼 존재 간의 정체성이 뒤바뀌는 신비한 공간, 물탱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1998년 등단 후 7년의 공을 들여 첫 단편집 (2005)를 냈고, 다시 5년 만에 이번 소설을 발표하며 작가로서 신중한 걸음을 걷고 있는 태씨는 전작 단편집에서 즐겨 다뤘던 환상의 세계를 장편에서도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주인공이 자기 삶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곳인 물탱크는 핸드폰도 시계도 작동하지 않는, "시간이라는 관념조차 사라져버린"(70쪽) 장소다. 이 외계에서 세종은 당연하게 '내 삶'이라고 여겨왔던 것들이 얼마나 허물어지기 쉬운 것인지 절감한다.

사태 초기 그는 가짜 한세종이 된 사내의 정체가 곧 들통날 것이고, 무엇보다 여자친구가 자신을 알아볼 것이라고 낙관한다. "'나'의 현재는 과거의 집적으로 일궈온 것"(99쪽)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여자친구와 사내는 옥탑방에 들이닥친 세종을 생면부지로 대하며 매섭게 내친다. 그 행동에 전혀 가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세종은 망연해진다.

결국 세종 역시 새로 옥탑방에 세든 남자를 상대로 신분을 세탁한다. 세종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는 공사장 일용직 인부로, 다리가 불편한 동거녀를 놔두고 이혼녀와 바람을 피우는 사내.

그의 동료 인부들은 느닷없이 옛 동료 행세를 하고 나서는 세종을 경계하다가 제수씨(동거녀)의 반응에 머리를 갸웃댄다. "나 원, 살다 보니 별일을 다 보네. 설사 저놈이 세종이 그놈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대."(162쪽)

덕분에 세종이 동명이인의 삶을 무난히 이어가던 어느 날, 동거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아비 모를 아이를 임신한 채 그에게 돌아온다.

그녀를 받아들인 세종은 예전의 혹은 지금의 한세종도 아닌, 새로운 한세종의 삶을 살아갈 결심을 한다. 존재도 관계도 결국 사람의 마음자리에서 형성되는 것이기에. "사실 알고 보면, 세상의 모든 관계라는 것도 불확실성의 토대 위에서 테마공원의 바이킹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나?"(174쪽)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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