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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발자취 따라… 그리스·터키 초기 기독교 유적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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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발자취 따라… 그리스·터키 초기 기독교 유적순례

입력
2010.05.06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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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이 나무랐던 타락도시 코린트, 이젠 흙먼지 날리는 폐허도시로…

'토막(土漠)은 영원히 토막이다… 길이란 황막함 위에 깔린 선(線) 모양의 황막. 그 길이 대지를 핥고, 거리와 마을을 뚫고, 사막을 더듬고, 다시 거리와 마을을 뚫고, 토막으로 나아간다.'

일본의 사진작가이자 문학가인 후지와라 신야는 20대의 한 시절을 터키에서 보내고 나서 자신의 망막에 인각된 이미지를 출세작 에 이같이 기록했다. 거대한 광물 덩어리 같은 산과 대지가 메마른 바람에 마모되고 있는 대륙 아나톨리아(소아시아).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태어난 구원과 박애의 가르침 기독교는 이곳을 거쳐 세계로 퍼져나갔다. 신약성서에 지명이 기록된 도시들은 이 척박한 땅에서 번성했다 다시 흙 속에 폐허로 묻혔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고행을 떠났던 사도들의 길은 여전히 토막 위에서 거리와 마을을 뚫고 이어져 있다.

서울 광림교회 신도 70여명이 로마 제국의 핍박 속에 선교 여행을 떠났던 예수 제자들의 길을 지난달 27일부터 지난 5일까지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되밟았다. 순례단의 여정은 사도 바울(AD 10~67 추정)의 발자국을 따라 이어졌다. 아나톨리아 남부 다소에서 태어난 바울은 예수를 직접 만나보지 못한 바리새인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불렸으나, 목숨을 건 3차례의 선교 여행을 통해 기독교 교리의 기틀을 잡은 인물이다.

출발지는 현재 그리스 땅인 코린트. 신약성서에 포함된 '고린도 전ㆍ후서'는 코린트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다. 바울은 로마 제국 전역에 퍼져 있던 초기 교회들과 활발하게 서신을 주고 받았는데, 편지에는 추상적인 신학이 아니라 특정 교회의 현실적 문제가 담겨 있다. BC 6세기부터 상업도시로 번영을 누린 코린트는 신전의 사제들이 매춘업에 종사할 정도로 타락한 곳이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에는 음탕함과 사치에 물들어가는 기독교인들을 꾸짖고 타이르는 엄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바울이 꾸짖었던 부와 향락의 세속도시는, 그러나 잡초 속에 간신히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4월의 따가운 지중해의 햇살 속에서 처음 마주친 코린트의 얼굴은 덩그렇게 남은 아폴로 신전의 기둥. 바울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흙먼지가 날리는 폐허를 한참 헤맨 후에야 바울이 로마 총독 갈리오로부터 재판을 받았던 단(壇), '비마(Bema)'를 찾을 수 있었다. 고대의 도로는 이오니아해를 향해 뻗어 있었는데 바울의 전도로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 고관 에라스도의 이름이 그 끝에 새겨져 있었다.

순례단은 바울이 건넜던 에게해 뱃길을 따라 터키의 에페스로 이동했다. 신약 성서에 '에베소'로 기록된 이곳은 비교적 많은 유적이 남아 관광지로 인기 있는 곳이다. 바울은 오랜 시간 이곳에 머물며 선교에 주력했고, 예수의 생모 마리아도 이곳에서 생을 마친 것으로 전해진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4배 규모 크기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다고 알려진 에페스도 코린트 못지않게 은성한 도시였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천막을 만들어 팔았던 바울의 복음은 이곳에서 손가락질과 핍박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바울 사후 200여년이 지난 뒤 기독교는 마침내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고, 에페스에는 6세기에 그를 기려 세워진 거대한 교회의 흔적이 지금 남아 있다.

순례단의 발길은 사데, 빌라델피아 등을 지나 라오디게이아로 이어졌다. 관광객의 눈으로 보면 볼품없는 유적일 수 있으나 순례단이 이곳에서 느끼는 감개는 사뭇 큰 듯했다. 요한계시록에는 라오디게이아 교회의 기독교인들을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고 책망하는 대목이 나온다.

분주히 사진을 찍던 신도들을 모아놓고 광림교회 김정섭 담임목사는 이렇게 설교했다. "이곳 교회는 가난한 다른 지역 교회에 돈을 보낼 만큼 풍요에 젖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신앙은 가난했어요. 이제 엉겅퀴만 남은 채 교회가 어디 있었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요. 현대의 교회도 물질적 풍요만 좇다보면 언제 이렇게 폐허로 변할지 모릅니다. 초기 기독교의 유적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아마 그런 것일 겁니다."

에페스(터키)= 유상호기자 shy@hk.co.kr

■ 광림교회 "서로 다른 언어·문화가 화합하는 출발점이 되길"

시리아 국경에 인접한 터키의 남부 도시 안타키야는 세속주의 국가를 표방한 터키에서 이슬람의 색채가 가장 강한 곳 가운데 하나다.

기독교 감리교단에 속하는 광림교회는 2000년 6월 이 도시에 안디옥개신교회를 세웠다. 지난 2일 교회에서는 현지 교인 30여명과 광림교회 성지순례단이 참석한 가운데 10주년 기념 예배가 열렸다.

"이슬람 사회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생명을 내놓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개종하고도 신분증의 종교란에서 '이슬람'을 지우지 못한 신도들도 있습니다.

안디옥개신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있는 장성호 선교사는 현지인 신도들의 규모와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하는 터키 정부는 '종교적 다양성'이라는 EU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안디옥개신교회를 정책적으로 보호하고 있지만, 뿌리 깊은 이슬람 전통의 토양에 개신교는 아직 착근하지 못한 듯 보였다. 터키에서 이슬람을 믿는 비중은 98%에 이른다.

안타키야는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여행을 시작한 도시로 전해진다. 신약성서에 기록으로만 남은 안디옥교회는 역사상 최초의 이방인 교회다.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가파른 언덕 위에는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난한 베드로가 AD 50년경 굴을 파고 예배를 드렸다고 알려진 동굴교회도 남아 있다.

광림교회 김정섭 담임목사는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의 교회들이 이방인인 바울을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회심을 인정한 곳"이라며 "새로 세워진 안디옥개신교회가 다른 언어,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화합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안디옥개신교회는 이날 예배에서 아프가니스탄 난민 소녀 등 5명의 현지 청년 신도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예배 전날 저녁에는 한국전에 참전했던 터키 군인들을 초대해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참전용사 위로회'도 열었다.

안타키야=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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