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재정위기는 지금 '21세기 흑사병'에 비유될 정도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이 위기 바이러스는 포르투갈, 스페인을 거쳐 이탈리아, 아일랜드, 심지어 바다 건너 영국까지 유럽 전역을 빠르게 감염시키고 있다.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그 다음은?
5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와 가디언 등 영국 언론들은 EU 집행위원회가 영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이 올해 유럽연합(EU) 27개국 중 가장 높은 12%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고 전했다. 앞서 4일에는 스페인이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 있다는 루머가 국제 금융시장을 급랭시켰고, 5일에는 국제 신용평가사인 무디스가 향후 포르투갈의 신용등급을 2단계 낮출 수 있다고 밝혀 시장을 공포에 빠뜨렸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스페인은 이날 여야 합의로 부채비율이 높은 저축은행에 대한 합병계획에 합의하는 등 사태진화에 나섰다.
워낙 빠르게 번지고는 있지만 그리스 이외 국가에서도 '국가파산 사태'가 현실화할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헤르만 반 롬푸이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5일 "지금 시장에는 터무니없는 소문으로 인한 비이성적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상황은 어떤 면에서도 그리스와 유사점이 없다"고 주장했다. 올리 렌 EU 경제통화 집행위원도 "스페인은 구제금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반면 악셀 베버 유럽중앙은행(ECB) 정책위원은 그리스 지원 문제를 논의하는 독일 의회에서 "그리스 재정위기가 유로존 전체로 확산될 수 있는 심각한 전염 효과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포르투갈 위험성
유럽의 위기전염이 빠른 것은 유로존이라는 '단일 경제권'의 특수성 때문이다. 유로존 회원국들은 동일 화폐를 사용할 정도로 상호 경제 의존도가 워낙 높아, 한 나라가 파산하면 이 나라의 채무를 갖고 있는 다른 나라로 빠르게 전파될 수 밖에 없다.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도 역내에서 빠르게 파급됐지만, 유로존은 차원 자체가 다르다는 얘기다.
LG 경제연구원은 그리스의 위기가 번져나간다면, 다음 국가는 포르투갈이 될 것으로 지목했다. 연구원은 "포르투갈도 그리스처럼 외부에서의 자금 지원이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에 비해 스페인은 정부부채 비율이 그리스의 절반 수준이고 높은 국내저축률로 인해 대외 의존도가 높지 않아 채무상환 능력 자체가 의문시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최대 채권국이라는 점. 이창선 LG경제연구원 금융연구실장은 "포르투갈이 무너지면 스페인 금융기관들의 손실이 커지고 결국 일시적인 유동성 문제에 봉착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세계 '더블 딥', 최악 시나리오?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이 실제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경우 영국 및 유럽 내 다른 국가의 금융기관도 연쇄 타격을 받게 된다. 외신에 따르면 영국 은행들이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세 나라의 국채에 물린 돈은 대략 1,000억파운드에 이른다. 프랑스와 독일 은행들도 그리스 국채에 각각 800억달러, 450억달러 가량이 묶여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유럽 재정위기가 그리스와 포르투갈의 연쇄 부도, 스페인과 아일랜드의 유동성 위기 등으로 확산될 경우 자칫 회복세를 타고 있는 세계 경제가 다시 '더블 딥'에 빠지는 최악 시나리오로 전개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물론 아직까지는 이번 위기가 '유럽 내 폭풍'에 그칠 가능성 전망이 우세하다. 남유럽 해외자산의 70% 이상이 유럽계 은행에 집중돼 있기 때문. 박희찬 미래에셋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유럽 각국의 국채 금리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을 보면 그리스의 경우 최근 급격하게 높아진 반면 다른 국가들은 상승 폭이 제한돼 있다"며 "주변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에선 유로존 붕괴 등 최악 상황이 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월가의 유력 투자정보지인 '가트먼 레터'의 설립자이자 헤지펀드 매니저인 데니스 가트먼은 CNBC와의 인터뷰에서 "혼란이 가중되며 EU나 유로존 붕괴도 가능하다"면서 "이 경우 (사실상 더블 딥이나 다를 게 없는 만큼) 미국 증시가 최대 15% 정도의 조정을 겪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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