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지역이 패션중심지가 될 수 있을까? 싱가포르는 연중 가장 추운 12월에도 평균기온 23~25℃를 웃도는 열대지역이다. 일년 내내 반팔 셔츠에 반바지 차림이 당연시 된다. 뚜렷한 4계절과 계절의 변화에 맞춰 일어나는 의류소비 수요가 패션산업 발전의 기초조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언감생심 헛물켠다 싶은데 뜻밖에, 간단치 않다. 지난달 28일부터 2일까지 싱가포르관광청과 싱가포르국제무역청 등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아래 펼쳐진 '2010 Asia Fashion Exchange(이하AFX)'는 파리컬렉션이나 뉴욕패션위크 등 서구 패션계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도 글로벌 패션산업의 달콤한 열매를 따먹을 수 있다는 싱가포르의 야심과 그 가능성을 보여준 행사였다.
28일 밤 니안시티 시빅플라자의 텐트에서 개막한 아우디패션페스티발(AFF)은 AFX의 4개 행사(아시아 젊은 디자이너들의 경연장인 스타크리에이션, 세계적인 패션정보업체 WGSN이 참가한 아시아패션서밋, 54개 싱가포르 및 해외 패션업체들이 참가한 트레이드쇼 블루프린트, AFF) 중에서도 싱가포르 정부의 지향점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자리였다.
5일간 열린 행사의 오프닝 무대는 싱가포르 현지 디자이너가 아닌 대담하고 섹시한 이탈리아 캐주얼브랜드 디스퀘어드2의 쌍둥이 디자이너 딘과 댄 케튼이 맡았다. 폐막쇼 역시 화려한 파티룩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로베르토 까발리가 차지했다. 그밖에도 헐리우드 스타 제니퍼 로페즈와 르네 젤위거가 즐겨입는 것으로 알려진 이브닝 가운 디자이너브랜드 마르케사, 스웨덴의 패스트패션브랜드 망고, 스와로브스키 등이 패션쇼를 펼쳤다. 글로벌 브랜드들의 화려한 후광이 페스티벌의 열기를 후끈 달궜음은 물론이다. 행사의 크리에이티브디렉터는 세계 패션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패션저널리스트 콜린 맥도웰이 맡았고 한국의 삼성을 비롯, 독일 자동차메이커 아우디와 마스터카드 등이 스폰서로 참여했다.
컬렉션의 주요 시간대를 자국 디자이너가 아닌 해외 디자이너의 앙코르쇼(이미 밀라노나 파리에서 발표된 패션쇼였다)로 채웠다는 것은 AFX의 관심이 트렌드 제시나 제품수주와 같은 패션컬렉션의 기본 취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답은 앤드류 푸아 싱가포르관광청 관광쇼핑외식 디렉터의 말에 들어있었다. 28일 밤 블루프린트 프리뷰파티에서 그는 "아시아는 5년 안에 세계 최대의 패션시장이 될 것"이라며 "기후적 특성으로 싱가포르 내 패션산업을 발전시키긴 어렵지만 세계가 아시아에 구애할 때 싱가포르가 허브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서구 산업계가 아시아의 재능있는 디자이너를 찾을 때, 아시아패션시장에 대한 정보를 원할 때 싱가포르를 찾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비록 패션발신지의 역할은 어렵지만 '아시아로 통하는 관문(your gateway to asia)'라는 싱가포르국제무역청의 슬로건을 패션산업에도 통용시키겠다는 계산이 깔려있다.
부수효과도 막대하다. 티진 리 AFF 마케팅디렉터는 "패션은 싱가포르에 오는 관광객들이 가장 돈을 많이 쓰는 분야다. 화려한 패션행사들은 관광대국 싱가포르에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더 많은 부를 가져다 주는 거대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AFX는 민간 주도로 실시되던 싱가포르패션위크를 올해부터 정부 지원을 통해 확대 개편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서구의 패권이 고착화된 패션컬렉션 시스템을 버리고 패션과 엔터테인먼트, 관광, 정보산업의 연계를 통한 부의 창출을 추구하고 있다. 서울시 주최 서울패션위크가 공허한 '세계 6대 컬렉션 진입' 구호에 매달리는 동안 경쟁자들은 '아시아 대표 패션 허브'라는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고지에 빠르게 다가가고 있는 셈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 맞다.
싱가포르=이성희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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