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원피스를 입은 바다(11)가 막내 산(10)의 손을 꼭 붙잡고 진달래가 만발한 공원을 뛰어다녔다. 모처럼 화창했던 날씨에 햇살을 머금은 1㎝크기의 작은 잎사귀들이 빛 무더기처럼 널려있는 틈바구니에서 바다의 조막손이 하늘거렸다. 바다가 속삭였다. "네잎클로버 여덟 개를 찾을 거에요, 우리 식구 힘내라고." 웬만해선 찾기 힘든 행운의 상징이 왜 그리 많이 필요한 걸까.
바다네 형제는 위로 아름(23) 유리(21) 종덕(18) 솔미(17) 종현(15) 하늘(13)과 막내 산까지 여덟(4남4녀)이다. 저출산 문제가 국가적 과제가 된 요즘, 바다네 같은 다둥이 가족은 어딜 가나 찬사를 듣기 일쑤다. 오순도순 왁자지껄한 가족 분위기에 사람 사는 맛도 절로 난다. 그러나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일찍 일어나면 야단 맞는 집
'가정의 달' 첫날인 1일 오후 인천 연수동 8남매의 엄마 김선미(43)씨의 영구임대아파트를 찾았다. 자식 하나 키우기도 어렵다는 우리사회에서 김씨는 "8남매를 낳은 걸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2003년 남편과 이혼했고, 최근엔 천식과 당뇨 때문에 닥치는 대로 했던 일자리마저 잃었다. 그의 유일한 자랑은 "단 한번도 아이들을 품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자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은 아니죠." 15평 아파트는 거실(30㎡)과 작은 방(6㎡) 하나가 전부다. 작은 방에 있는 초등학생용 침대엔 키 178㎝인 종덕이가, 아래 바닥엔 솔미와 유리가 함께 잔다. 나머지 여섯은 거실에서 잔다. 엄마는 "발도 제대로 못 펴고 자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저리다"며 고개를 떨궜다.
아홉 식구가 그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니 남다른 규칙도 필요하다. 아침에 잠 깨는 순서가 정해져 있을 정도. 학교에 가기 전 하나뿐인 화장실을 질서 있게 이용하기 위해서다. 고등학생인 솔미가 오전 6시에 가장 먼저 일어나고 다음은 아름 유리 종덕 하늘 바다 순이다. 막내 산이는 가장 늦은 오전 7시40분에 깨야 한다. 하늘이는 "친구들은 늦게 일어나면 혼나는데 우리 집은 조금만 일찍 일어나도 혼난다"라고 웃었다.
큰 딸의 희생
엄마는 아버지 없이 홀로 가장 역할을 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죄스럽다. 당장 입에 풀칠을 하려니 육아는 아무래도 뒷전일 수밖에 없다.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했을 때는 어린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김씨에게 힘을 준 건 큰 딸 아름이었다. 아름이는 2005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집에 들어와 동생들을 보살폈다. 김씨는 "아름이가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했지만 동생들의 교복을 다릴 때마다 남몰래 울던 모습을 많이 봤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부모 품이 그리운 막내 산이는 그런 사정을 알리 없다. 한번은 산이가 교실에서 울다가 실신한 적이 있다. 의사는 "아이가 애정결핍 증세를 보이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전 남편을 잘 따랐던 산이가 아버지와의 연락이 완전히 끊기자 정서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이다. 김씨는 "산이가 자다가 갑자기 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게 전부"라며 산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래도 꿈과 소망은 숨쉬고
팍팍한 살림이지만 아이들은 구김살없이 꿈을 꾼다. 좁은 거실 벽 곳곳엔 효행상 우등상 글짓기상 등 각종 상장이 붙어있다. 수학시험에서 전교 5등 안에 들어 학교대표로 중앙올림피아드 예선에 진출한 초등학교 5학년 하늘이는 "꼭 우승해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유리는 헤어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미용학원을 다니고 있다. 최근 학교성적이 무려 100등이나 오른 솔미는 약대 입학을 목표로 공부 중이다.
동생들 돌보느라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아름이는 2007년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를 꿈꾸고 있다. 바다는 그림에 소질을 보이고 있다. 엄마는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어 흐뭇하다.
엄마의 소망은 아이들의 성공이 아니다. 김씨는 "매일 도움을 받고 살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가족이 되고 싶다"고 했다. 김씨 가족의 딱한 처지를 들은 누군가는 익명으로 영구임대아파트 입주비를 대신 내주었고, 종덕이와 솔미가 다니는 사설학원도 수강료를 받지 않고 있단다. 생계는 정부보조금과 적십자사에서 주는 쌀로 근근이 이어가고 있다.
김씨는 "이혼하고 힘들 때는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는데, 인생이 힘들다고 하면 더 힘든 것 아니겠냐"며 "아이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자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날 바다는 결국 공원에서 네잎클로버를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작은 잎사귀 4개씩을 손으로 꼬깃꼬깃 모아 붙여 네잎클로버처럼 만들었다. 그러고는 까치발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직접 만든 네잎클로버들을 오빠와 언니들의 웃옷 호주머니에 넣어줬다. 바다의 웃음 소리가 파란 하늘 아래 넓고 크고 높게 울리더니 바람에 실려갔다.
류효진기자
김현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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