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노공주ㆍ46)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절뚝거리는 한쪽 다리에도 불구하고 막내가 10m 거리를 뛰어간 시간은 '눈 깜짝할 새'. 아이의 옷을 낚아 채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엄마는 잠깐의 비명이 아니라 평생 통곡을 할 수도 있었다.
아파트 복도 난간에 매달렸던 무표정한 아이는 멍했다. "엄마. 마. 마." 엄마는 고함을 쳤다. "거기 올라가면 떨어져 죽어, 죽어!" 5일 경북 경산군 백천동 A임대아파트 914호의 어린이날 아침 풍경은 한판의 전쟁이었다.
식구는 모두 여덟. 할머니를 빼곤 부모와 5남매 모두 장애를 안고 있다. 나들이 준비나 선물공세에 즐거운 소란이 벌어질 다른 집과 달리 914호는 아슬아슬한 소동이 끝나자 이내 침묵에 잠겼다. 짜증과 사랑이 범벅이 된, 어제와 같은 또 지난해 어린이날과 다르지 않은 일상 그대로였다.
셋째 은주(13ㆍ정신지체1급, 심장장애3급)는 간질 약에 취한 채 또 잠들었다. 혼자 놀다 지친 넷째 대열(10ㆍ지적장애2급)이는 좁디 좁은 방안(세평)을 유리구슬로 도배했다. 심심하다며 고함도 여러 차례 질렀지만 돌아온 건 아빠(정근효ㆍ47)의 호통뿐. 어린이날이란 걸 알고 있는 대열이가 잔뜩 골이 나 "로봇, 로봇"을 외치자 아빠는 애써 외면했다. 아빠는 고혈압, 신장질환, 손가락 절단 등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고, 엄마는 목 디스크, 복막염, 결핵, 골반 골절 등으로 역시 아이들을 돌보기도 힘든 처지다.
결국 대열이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까지 앓고 있는 터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현관문에서 엘리베이터까지 아파트 복도 30m가량을 요란스레 뛰어다니는 게 고작이었다. 종일 그랬지만 대열이와 놀아주는 이는 없었다.
이날 아침 소동의 주인공인 막내 성열(9ㆍ자폐2급)인 엄마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엄마는 냉장고 앞을 가로막고 섰다. 간식은 고사하고 밑반찬 몇 개밖에 없는 공간을 굳이 틀어막는 이유가 있다. 가족의 생존을 위한 약품저장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열인 자해(自害)를 하는 습성이 있어 냉장고 안에 있는 약품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주사바늘로 온몸을 찌른다고 했다.
맏이 은미(16ㆍ지적장애)는 아침부터 TV 앞을 떠나지 않았다. 어린이날 특집 프로그램에 가족이 놀이동산 가는 장면이 나오자 난데없이 이날 처음 만난 기자에게 선물을 사달라고 졸라댔다. 1만원짜리 손 지갑이 너무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사시(斜視) 증상을 갖고 있으나 그나마 사정이 가장 나은 둘째 종열(14)이는 컴퓨터게임으로 하루를 보냈다. "어린이날이라고 특별한 거 없어요." 심드렁하게 말하더니 인터넷게임 '리니지'에서 선물보따리 모양의 아이템을 수집했다.
아이들 중 누구도 그 흔한 자장면이라도 시켜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서로서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매달 10만원씩 대열이네를 후원하던 손길도 최근 끊겼다. 그렇게 어린이날이 저물었다.
이날 914호의 가장인 아빠는 종일 웃지 않았다. "어린이날이라는 건 알지만 특별히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만 했다. 이날 부모의 수중엔 4만원이 있었다. 식구들 병원비와 오토바이 기름값을 대기에도 빠듯하다고 했다. 4일 보건복지부는 경제적인 원인 등으로 방임되는 아이들의 수가 100만명이 넘는다고 발표했다. 후원문의: 어린이재단 희망나눔콜센터(1588-1940)
경산=글·사진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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