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 다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시 대학특강에서 한 얘기다. 노무현식 편가르기 어법의 진수를 보여준 이 발언은 보수에 대한 그의 닫힌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물론 감정 섞인 정치적 수사여서 굳이 개념의 정확성을 따질 건 아니다.
사실 한국의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개념에는 지지정당, 대북성향, 개별이슈에 대한 입장에 지역정서까지 뒤엉켜있어 엄격히 구분하려는 시도자체가 부질없다. 도리어 양쪽 모두 사회개선을 위한 부단한 변화 없이는 정당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보수ㆍ진보가 크게 다르지 않다. 변화의 폭과 속도를 얘기하자면 차라리 보수와 수구, 진보와 급진의 구분에 가까워진다.
기존의 보수와는 다른 보수
이념론을 꺼낸 이유는 최근 한나라당 서울시장 경선에서 낙마한 원희룡 의원을 얘기하고자 함이다. 그는 보수정치인이다. 자신도 그렇게 얘기하거니와, 그 간의 언행으로도 그렇다. 가령 그는 대한민국 건국사를 긍정과 성취의 역사로 보고,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단정노선과 토지개혁 등에 대해서도 건국과 경제개발의 토대를 세운 업적으로 평가한다. 진보라면 어림없다.
이념을 가르는 주요기준인 대북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2006년 북핵사태 때 그는 "용납할 수 없는 도발" "민족적 배신감" 등의 용어를 써가며 무력사용을 제외한 가능한 모든 대북제재를 주장했다. 나아가 북한체제를 인정하거나 애매하게 공존하는 방식의 연방제 통일론도 반대한다. 무엇보다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옹호론자라는 점에서 그는 명백히 보수주의자다.
그러나 3선의 중진임에도 그는 정통보수정당이라는 한나라당에서 여전히 비주류이자 변방이다. 좋게 말해봐야 한줌의 소장파 중도그룹의 리더일 뿐, 등 뒤에서 걸핏하면 듣는 소리는 '왕따' '이방인'이다. 과거엔 심지어 '야당의 간첩'이란 말까지 들었다. 자주 당과 지도부 노선에 맞서 쓴 소리를 마다 않는 비집단주의적 정치행위 때문이다.
예전 사학법 투쟁과 관련, 당시 박근혜 대표체제와 정면으로 맞서 박사모의 '공적 1호'로 찍혔는가 하면, 현 정부에선 미 쇠고기수입문제, 세종시 문제 등에서도 공개적인 이견을 표출했다. 소통과 절차를 내세워 일방통행식 정치문화에 사사건건 브레이크를 거는 것도 늘 그다. 확실히 한나라당의 일반적 보수와는 함께 묶을 수 없는 다른 보수다.
결국 원 의원은 경선에서 탈락했다. 현직후보에게 별 결격사유가 없었으니 예상된 결과이긴 했다. 그러나 일반여론조사에선 앞섰으되, 책임당원조사에서 밀려 첫 문턱도 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말하자면 제 식구들에게 선택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한데, 한나라당의 체질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한나라당의 최근 행보는 여러모로 걱정스러운 판국이다. 집권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우려했던 대로 정치와 국가운영에 있어서 안하무인식의 비타협적 행태와 이념적 경직성이 점차 두드러진다. 심지어 조전혁 의원의 사례에서 보듯 기본적 법 체계마저 정면으로 무시하려 드는 일까지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조 의원이야 문제의 당사자니까 그렇다 쳐도 동료의원들이 패거리 지어 법체계에 도전하는 행위는 그들 표현대로 조폭행태에 다름 아니다. 이걸 한나라당의 이념적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이게 바로 노 전 대통령이 조롱한 별놈의 보수다.
합리적 보수를 포용치 못하면
가장 최근 조사에서도 우리 국민의 이념성향은 보수ㆍ진보 각 30%에, 중도 40%로 수년간 거의 고정화돼 있다. 젊을수록 진보의 비율이 높은 것도 여전하다. 지금의 낡고 완고한 체질을 깨지 못하면 한나라당에 기대할 것이 별로 없으리란 뜻이다. 보수이되 나름 합리와 개혁을 지향하는 열린 보수문화를 지금부터라도 포용하고 키우지 못하면 앞날은 더욱 갑갑해질 것이다. 아직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원희룡 같은 정치인이 그나마 우리 정치에서 소중한 이유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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