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정부에서 국방부장관을 지낸 윤광웅 제독은 50년 만의 해군 출신 장관이었다. 그에 앞서 창군 주역인 손원일 제독이 1953년 6월부터 3년간 장관직을 맡았을 뿐이다. 육군은 말할 것도 없고 공군도 장관을 여럿 배출한 것과 비교된다. 해군의 위상과 영향력 등을 가늠하는 데 참고할 만하다.
윤 장관은 어제 아침, 한국일보의 기획 대담에서"해군과 정부가 초기 대응을 잘 했다"고 말했다. 해군 출신이니 그저 감싸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정부 고위인사가 이 정부를 두고"신중하게 잘했다"고 평가한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혼란의 근본은 극단적 대북인식
이번 사태 직후 해군을 비롯한 군은 몰매를 맞았다. 상황 보고와 비상 이함(離艦), 인명 구조, '새떼'추적, 구조함 출동 등에 이르기까지 온통 허둥대고 늦장부리고 무능했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나 충격적 사태에 군의 설명조차 모호한 것에 여론이 불안감을 느낀 탓이 크다. 게다가 군과 정부를 무작정 불신하는 이들이 악의적 의혹과 논란을 부추겼다.
그날 밤, 합참의 발표는 착오와 혼선이 두드러졌다. 엇갈리기 마련인 발생시각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론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선지 폭발과 함체 절단을 숨긴 채'파공에 의한 침수'라고 발표해 오해와 시비의 빌미가 됐다. 북한 소행일 개연성을 애써 외면한 이들이 좌초, 피로 파괴 등에 매달려 피격 가능성을 부정하는 근거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천안함과 해군은 통상 경비작전 중 돌발한 상황에 잘 대처했다. 천안함 지휘부는 피격 6분 뒤인 밤 9시28분, 휴대전화로 2함대사령부에 긴급상황을 보고했다. 2함대는 9시31분 작전사령부에 보고하고 해경에 구조요청을 했다. 2함대사령관은 9시38분 지휘통제실에 달려 나왔다. 작전사령관도 이내 진해 벙커에서 대응작전을 지휘했다. 천안함 생존 장병들이 생사의 기로에서도 군기를 유지했다는 증언을 되뇔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한 논란이 이어진 것은 사태 원인과 성격이 모호한 때문이다. 2002년 2차 연평 해전에서 우리 고속정이 북의 기습에 격침됐을 때는 이번과 같은 혼란은 없었다. 상황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정보가 부족하거나 이해하기 힘들면 유언비어가 난무한다.
언론과 사회가 해군을 모르고, 알려 하지 않은 점도 작용했다. 기뢰와 어뢰를 분간하지도 못하는 이들이 갖가지 의혹을 제기하고 스스로 해설까지 서슴지 않았다. 또 기뢰든 어뢰든 수중무기에 수상함정이 얼마나 취약한지 모르면서 저마다 이념과 정치 취향을 좇아 군과 정부를 비난하고 불신한다.
보수는 북의 위협과 안보를 강조하기 위해 '군기 빠진 얼뜬 군대'를 나무란다. 거꾸로 진보는 북한 소행을 부인하기 위해 서해는 애초 잠수함 침투가 어렵다거나, 초계함이 어뢰 공격을 까맣게 모를 수 있냐고 의심한다. 이런 논리는 모두 왜곡되거나 과장됐다.
북한은 서해안 여러 곳에 잠수함 기지가 있다. 그만큼 쓸모 있다. 서해 얕은 바다는 잠수함 작전이 힘들지만 수중 탐지도 어렵다. 음파 탐지를 막는 해저 지형과 조류 등 장애물이 많다. 적이 침투할 개연성은 늘 있고, 대응은 상상보다 훨씬 어렵다. 원래 대잠전(Anti Submarine Warfare)은"함선이 침몰해야 잠수함의 존재를 안다"는 경구가 있을 정도다.
대통령도 차분한 대응 유지를
그러나 이런저런 논란이 유례 드문 갈등에 이른 근본은 우리 사회의 대북 인식이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현실이다. 강경보수는 무작정 냉전적 안보우선 논리를 외친다. 완고한 진보는 군사적 대치를 외면한 채 교류협력에만 집착한다. 양쪽 모두 대결과 공존의 이중적 상황에 올바로 대처하는 지혜가 아니다. 북한이 은밀한 도발을 했다면, 바로 이런 갈등을 노렸을 법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강파른 극단론이 어지러운 속에서도 국민 다수는 맑은 눈물을 흘리며 차분한 자세를 지킨 사실이다. 오늘 전군지휘관회의를 주재하는 대통령도 군보다 사회가 더 문제라는 사실을 유념했으면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