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 윤의사 유해 통행로에 암장… 14년간 행인들 발에 밟혀
동해와 면한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시. 오사카에서 북동쪽으로 255km 떨어져 있는 인구 46만명의 도시 가나자와는 일본 북륙(北陸)지역의 중심지다. 올망졸망한 야산이 둘러싸고 있는 도시는 태평양전쟁 때도 미군의 공습을 피해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러나 평화롭고 고즈넉한 이 도시의 이면에는 일본 군국주의가 남긴 생채기와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통분이 새겨져 있다. 일제의 대륙 진출 선봉대였던 일본군 9사단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이곳에 주둔했다.
그리고 중국 상하이 출병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축승 잔치를 하던 1932년 4월 29일, 일본군 수뇌부에게 폭탄을 던져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떨친 식민지 한국의 청년 윤봉길(1908~1932)이 이곳에서 순국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78주년 기념일을 사흘 앞둔 지난달 26일, 윤 의사가 묻혀 있던 가나자와시 외곽 노다(野田)산 기슭의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을 찾았다. 이 묘원은 러일전쟁 때부터 천황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일본 군인들을 기리는 이시카와현의 공식 추모시설이다.
묘원 입구에 윤 의사 추모 모임이 설치한 '尹義士 遺詩碑ㆍ暗葬跡碑'(윤의사 유시비ㆍ암장적비) 표지판을 따라 50m쯤 걸어가면, 일본군 전사자 추도시설이 세워진 묘역으로 들어서는 비탈진 통행로에 이른다.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절명한 윤 의사는 1946년 3월 유해가 수습될 때까지 13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이 통행로 한 구석에서 비바람과 이슬을 맞아야 했다.
조국으로 유해가 송환된 뒤 오랫동안 방치돼있던 윤 의사 암장지는 순국 60주년이던 1992년 12월 19일 윤 의사를 기리는 재일동포들이 뜻을 모아 비석을 세우면서 추모 공간으로 꾸며졌다.
윤 의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기 전 가족에게 남긴 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ㆍ대장부는 집을 나서 뜻을 이루지 못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이 새겨진 작은 비석과 그 옆에 놓인 국화 몇 송이. 유해가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간 망국 청년의 비애를 새삼 느끼게 한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이곳에서 발굴돼 고국으로 봉환된 윤 의사의 유해는 효창원으로 모셔졌지만, 이 암장지에는 아직도 윤 의사의 유발(遺髮)과 순국 당시 입고 있던 옷가지 일부, 총살 당시 윤 의사를 묶었던 십자(十字) 모양의 틀이 묻혀져 있다.
암장지 남쪽 언덕에는 '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가 동해를 바라보며 세워져 있다. 윤봉길의사현양회, 윤봉길의사암매장지적보존회 등 윤 의사를 기리는 모임의 회원들은 매년 의거일과 순국일에 이곳에서 추모모임을 열고 있다.
윤 의사 유해 발굴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병권(80) 윤봉길의사암매장지적보존회 사무국장은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가나자와의 조선인 청년 수십 명이 사흘 밤낮으로 묘원을 파헤쳤지만 암장지를 찾지 못했다"며 "암장 당시 독경했던 여승을 수소문, 겨우 암장지를 찾아 유골을 수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암장지는 유해 발굴 전까지 묘원을 찾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는 통행로였다. 그는 "유해 수습 당시, 길바닥에 윤 의사가 묻혀 있었다는 데 분을 이기지 못한 조선인 청년들이 모두 큰소리로 통곡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은 일본군 전몰자 묘역에서 비석 하나를 가리켜 보였다. '상하이사건 진몰자 합장비'. 상하이사건은 일본군이 1932년 1월 상하이를 침공한 사건이고, 이 비석 건립 시기는 1932년 12월, 윤 의사가 순국한 달이다.
비석을 세운 이는 윤 의사의 의거 당시 발가락 5개를 잃은 우에다 겐키치(直田兼吉) 당시 일본군 9사단장이다. 김 사무국장은 "윤 의사 암장지 옆에 이 비를 세운 것은 윤 의사에 대한 우에다의 반감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 합장비 인근에는 러일전쟁 때 포로로 끌려왔다 숨진 러시아 군인들을 위령하는 비석들도 세워져 있다. "교전국 군인들의 추모비까지 세워주면서 봉분도 묘표(墓標)도 없이 윤 의사를 길가에 묻은 일본의 처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고 김 사무국장은 울분을 토했다.
동행한 김관원 동북아역사재단 홍보팀장은 "윤 의사에 대한 일본 군부의 치졸한 복수는 당시 일본 군법도 무시한 처사"라고 덧붙였다. 1987년 공개된 일본군 보고서는 윤 의사 사형 집행과정과 집행 후 조치를 명시하고 있다.
보고서의 '사형집행 후 처치' 항목에 따르면 사형집행 후 유해를 찾는 친지가 있을 경우 인도하도록 돼 있으며, 찾는 이가 없을 경우 유해를 토장하고 가로 세로 9cm의 묘표를 지면에서 45cm 높이로 세우도록 하는 등 세세한 부분까?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 9사단은 유해를 인수하려는 윤 의사 가족의 요청을 묵살한 뒤 "찾는 이가 없어 화장해버렸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윤 의사의 암장지는 그나마 보존돼 있지만 정작 윤 의사가 순국한 곳은 일반인들이 찾아가기 쉽지않다. 윤 의사는 암장지에서 차량으로 5분 정도 걸리는 미코우 산의 일본군 9사단 작업장 서북쪽 골짜기에서 순국했다. 현재 이곳은 일본 육상자위대의 훈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나자와시는 2000년 우익 인사들이 태평양전쟁을 미화하는 '대동아성전비'를 세우는 등 원래 보수 세력이 득세하던 지역이다. 그러나 2006년 윤봉길 의사를 추모하는 일본인들이 '윤봉길과 함께하는 모임'을 결성하는 등 최근 윤 의사의 정신을 기리고 한일 간의 평화와 공존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활기를 띠고 있다.
10여명으로 시작한 이 모임 회원은 요즘 40여명으로 늘었는데 윤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을 방문해 강연회를 열기도 한다. 모임 회장인 다무라 미츠하키 호쿠리쿠대 교수는 "일본의 중ㆍ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물론 이시카와현의 역사를 다룬 책에도 윤봉길 의사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며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관계는 결국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관계에 불과한 만큼, 일본은 과거에 눈을 뜨고 식민지배를 반성하고 사죄해 두 번 다시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6년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가나자와에서 옮겨져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와 함께 효창원에 안장된 이래 2009년까지 모두 119위의 해외 독립유공자 유해가 국내에 봉환돼 안장됐다. 그러나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올해까지도 발굴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포함한 해외 순국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는 200위 이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 "순국지에 추모비 건립하여 한일간 화해계기 되길…"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 78주년을 맞이하였다. 윤 의사는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중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윤 의사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유언을 남기고 부인 배씨에게 "물 좀 한 그릇 주오"라는 말로 이별하고 중국 상하이를 향해 집을 나섰다. 백범 김구를 만난 윤 의사는 '마음의 폭탄'을 가슴 속에 지니고 상하이로 왔다면서 이봉창 의사와 같은 임무를 맡겨줄 것을 요청했다.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왜적을 처단할 것을 맹서한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기념식에서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하여 상하이 점령의 승리를 외치던 침략의 원흉들에게 폭탄을 던져 응징하였다.
윤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는 여러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선 전승기념식에서 상하이 점령 일본군관민의 수뇌부들에게 철퇴를 내렸으니 일본군의 상하이사변 전승의 의미를 크게 퇴색하게 만들었다. 장개석 총통이 말한 대로 중국군 30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윤의사 혼자 해낸 것이다. 결국 일본군은 중국 측과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일본으로 부대를 복귀시켰다.
윤 의사의 의거는 1930년 7월의 만보산사건 이후 악화되어 있던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한중 양국의 항일연대를 회복시켰을 뿐 아니라 중국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윤의사의 의거는 한국과 한민족의 존재와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크게 부각시켰으니 한 개인으로서 이렇게 영향력 있는 행위를 성사시킨 인물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현장에서 체포된 윤 의사는 일본 군중들로부터 뭇매를 맞아 선혈이 낭자한 상태로 끌려가면서도 그들을 상대로 냉소를 지었으니 대사를 이루었다는 회심의 미소였으리라. 윤 의사는 모진 고문을 받고 1932년 5월 25일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일제는 윤 의사를 상하이에서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오사카 위수형무소로 이감하였다가 가나자와로 이송하였다.
가나자와는 윤 의사의 의거로 중상을 입은 우에다가 사단장인 9사단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윤 의사는 그해 11월 19일 새벽에 북풍이 부는 부대 내의 깊은 산속에서 '침착(沈着)하고 강담(剛膽)'한 태도로 순국하였다. 올해는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윤 의사의 순국지에 추모비를 건립하여 한일 간의 화해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 운동사硏 소장
■ "日 부대장, 징용자를 죄인 호칭 오전 6시부터 12시간 중노동"
일본 이시카와 현청 소재지인 가나자와에 가기 위해서는 1시간가량 떨어진 고마츠 시의 고마츠 공항을 이용해야 한다. 고마츠 공항에서는 F-15 전투기나 UH-40 헬기 등이 굉음을 내며 이착륙하는 광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이 공항이 일본 방공자위대와 활주로를 함께 쓰기 때문이다.
고마츠 공항 건설의 역사는 태평양전쟁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공항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해군의 전투비행장으로 건설됐다. 댐, 도로, 철도 등 식민지 시기 일본의 건설 현장들이 다 그랬듯 고마츠 공항 건설에도 많은 조선인이 동원됐다.
오모리 사다츠쿠(大森定嗣ㆍ81) 일조협회 이시카와지부 이사장은 "1944년 당시 중학생으로 고마츠 공항 건설공사에 동원됐다"며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동원된 것으로 기억한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국내 생존 동원자들의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1944년 9월부터 1년 동안 고마츠 공항에 끌려가 군수품 하역작업과 활주로 제설작업 등을 했다는 김운배(86ㆍ전남 여수시)씨는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노동에 시달렸다.
식량을 지급했으나 너무 소량이어서 얼마 안되는 월급을 들고 마을에 가 쌀이나 음식 바꿔먹기에 급급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부대장들은 징용자들을 죄인이라고 불렀으며 도망가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지리를 몰라 도망가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이시카와 현은 탄광지대인 큐슈 지방이나 군수공장이 많았던 태평양 연안 쪽보다는 강제동원이 적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이다. 가나자와 시 남쪽 구릉지대의 누카다니(額谷) 계곡은 요즘은 학생들의 자연체험 트레킹 코스로 이용되고 있지만 이 아름다운 계곡에도 조선인 강제노동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군용기 부품을 생산했던 미츠비시중공업은 일본 군부의 '미국전략폭격계획'에 따라 1945년 4월부터 누카다니 계곡 중간중간에 뚫린 19개의 동굴에 지하공장을 건설, 종전 때까지 군용 설비를 생산했다.
당시 이곳에만 600여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됐다.
가나자와= 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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