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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42> 민주화열기와 운동권 자화상 보여준 인천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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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42> 민주화열기와 운동권 자화상 보여준 인천대회

입력
2010.05.02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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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투쟁이 있어 왔는데, 1986년에는 그 절정을 이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민통련은 신민당 개헌현판식에 맞춰 민주헌법쟁취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했고, 학생과 노동자, 농민은 물론 종교인, 언론인, 법조인, 출판인, 여성 등 국민 각계가 형식과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반독재민주화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전두환 정권은 강경책과 온건책을 번갈아 쓰면서 국민을 협박하거나 기만해보려고 애썼으나 민주화의 거대한 흐름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1985년 9월경부터 나는 경찰의 출두요구를 거부하고 피신하게 됐는데, 청계노조의 가두시위와 구로연대파업 지원 농성 등과 관련해 무언가 꼬투리를 잡아 구속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지명수배가 아니어서 집에 들어가거나 민통련 사무실에 출근하지 못할 뿐 활동은 활발하게 했다.

그런데 1986년 초에 벌어진 많은 사건 가운데 특별히 다음 두 사건의 사회적 파장이 컸다.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의 분신자결사건과 서울대학생 김세진과 이재호의 분신자결사건이 그것이다.

박영진은 그 해 3월 17일 부당노동행위와 노동운동탄압에 항의하여 투쟁하다가 경찰의 탄압에 맞서 분신자결했는데, 그 시기가 마침 민주화투쟁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3월 중순이라 노동자는 물론 학생과 재야민주세력에게 투쟁의지를 높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나는 박영진의 분신자결과 관련해 '투쟁의 불길은 치솟았다'는 제목의 글을 쓴 일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제목을 당연한 걸로 생각했으나 그 뒤 박영진의 청순한 얼굴과 아름다운 마음씨를 접하면서 내가 너무 비인간적이 된 것 같아 깊은 자책감에 빠진 일이 있다. 그래서 모란공원 묘소에 있는 그의 사진을 볼 때마다 '투쟁의 불길' 운운했던 게 너무나 죄스럽고 부끄러워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김세진ㆍ이재호의 분신자결사건은 학생들의 구호, 곧 '반전반핵 양키고홈'이 과격한 것만큼이나 그들의 행동 또한 격렬함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학생들은 전방입소 거부와 반미 투쟁을 격렬하게 전개했는데, 이것은 일반국민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거였다.

현실을 무시한 관념적 이념지향성에서 나온 학생들의 이러한 행동은 국민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함은 물론 학생운동의 극심한 대립과 분열을 가져왔다. 민민투(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와 자민투(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는 그 당시 학생운동의 대립과 분열을 상징하는데, 그 명칭만 보더라도 학생들이 얼마나 관념적 이념에 기초해 과격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그 과격성과 분열로 국민대중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학생들의 광범한 참여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념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학생들의 특성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민주화에 대한 학생들의 요구가 강렬한 데 따른 것이었다.

5ㆍ3인천대회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열렸다. 민주세력으로서는 국민 각계의 민주화 열기를 모아내 전두환 정권을 물리치는 전기를 마련해야 했다. 민통련은 중앙위원회를 열어 총력투쟁을 결의하고 지운협의 청년운동가들은 물론 본부의 상근자들도 실무준비에 투입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확성기가 중요해 리어카에 대형스피커 4개를 설치했는데, 민청련이나 서노련 등의 핸드마이크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개헌현판식이 열릴 인천 시민회관 앞에는 오전 일찍부터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어 현판식이 예정된 11시경에는 10만명 이상의 군중이 운집했고 민통련도 일찌감치 시민회관 앞 광장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날 신민당의 개헌현판식은 오후 3시까지 연기되다가 끝내 열리지 못했는데, 민민투와 자민투 소속 학생들이 행사 시작 전 시위를 벌여 경찰이 이를 핑계로 김영삼 고문을 포함한 신민당 지도부의 행사장 입장을 저지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민당의 현판식은 열리지 못했지만 민통련을 포함한 재야단체들은 나름의 연설회를 개최해서 자기들의 주장을 폈는데, 경찰이 이를 제지하기 위해 페퍼포그를 쏘아 시민회관 앞 네거리는 페퍼포그로 뒤덮였다. 그런데도 민통련의 간부와 지역활동가들이 연이어 연단 위에 올라가 연설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특히 이호웅, 이우재 등 인사련(인천사회운동연합) 동지들의 한복투쟁은 불굴의 의지를 보여줬다. 마침 오늘이 5월 3일이니 만 24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신민당의 현판식이 열리지 못해 끝나지 않으니 민통련이 집회나 시위를 주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본래 계획한 서울진격도 불가능했다. 신민당의 고성능확성기가 계속 큰 소리를 내뿜어 민통련이 준비한 배拷?확성기로는 당해낼 수가 없었던 데다 그곳에 온 시민의 대부분이 신민당 현판식의 개최에 관심을 쏟아 민통련 주최의 연설회에 참여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5ㆍ3인천대회는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해산되면서 산발적인 시위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5ㆍ3인천대회는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의 퇴진은 불가피함을 보여줬다. 비록 이 대회 후 '소요죄' 운운하며 100여 명 이상 구속하는 등 민주화운동을 초토화하는 듯이 보였지만 국민의 광범위하고도 강렬한 민주화 요구가 확인된 이상 이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 대회 직후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와 신민당의 이민우 대표가 개헌특위의 구성에 합의했는데, 이것은 민주화로의 이행이 불가피함을 말해주는 거였다.

그런데 5ㆍ3인천대회는 부끄럽게도 무질서와 분열로 점철된 운동권의 자화상 전시장이기도 했다. 학생들의 분파적 행동은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민청련과 서노련은 민통련 소속 단체이면서도 민통련의 민주헌법쟁취투쟁에 동참하지 않고 별도의 집회를 열어 '직선제 개헌'을 외치거나 '삼민헌법쟁취'를 외쳤다. 이념적 독단에 빠진 때문이었는데, 그 폐해는 실로 엄청났다.

나는 5ㆍ3인천대회 주도 혐의로 구속됐는데, 구속되어 있던 2년6개월 동안 바깥 생활보다 더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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