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저녁 서울 남산 국립극장.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나이 지긋해 보이는 수강생들이 사랑가 중 한 대목을 목청껏 부르자 "좋아요. 많이 늘었네요" 라는 선생님의 칭찬이 이어진다. 수강생들의 발그레한 얼굴은 이내 환해지고 선생님이 다시 북을 두드리자 다시 한 번 목청을 돋운다.
이들은 국립극장과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이 올 4월 처음 문을 연 '전통예술 최고경영자 과정'의 수강생이다. 국악 등 전통 문화 예술을 배우는 과정으로 40명의 수강생들은 1주일에 한 번 모여 황병기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등 유명 예술인의 강의와 함께 단가와 단소를 직접 배우고 있다.
대부분 처음 악기를 배우거나 노래에 자신 없어 늘 남 앞에 서는 걸 어색해 하지만 열정만큼은 대단하다. 단소 실기를 맡은 이용구 국립국장 책임강사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악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수업 전후에도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고 전했다.
단가를 배우는 변인근 중앙디자인 회장은 "집, 사무실, 차 안 곳곳에 악보를 두고 원곡 CD를 틀어놓고 따라 부른다"며 "사랑가 한 번 멋지게 불러 직원, 가족들에게 국악과 우리 것의 소중함을 느끼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단소반의 한규택 삼주에스엠씨 회장은 "체험을 통해 우리 가락과 전통 예술을 알 수 있어 몸과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라며 "해외 바이어를 만날 때마다 우리 것을 알려주고 싶어도 잘 알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즐거워했다.
프로그램의 탄생에는 국악 대중화를 위해 애써온 국립극장과 좀 더 다양한 문화 예술 경험을 얻고자 하는 CEO들의 욕구를 실현할 대상을 찾던 aSSIST가 장단을 맞췄다. 국립극장은 강사진, 교육프로그램, 장소를 맡고 aSSIST는 수강생을 책임지는 형태로 손을 잡은 것. 임연철 국립극장장은 "국악이 소중하다지만 정작 접해 볼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며 "특히 영향력 있는 CEO들이 국악을 좋아하고 이를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CEO들 사이에 불고 있는 인문학 배우기 열풍도 몇 년 째 이어져 오고 있다. 2007년 CEO를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의를 가장 먼저 시작한 서울대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AFP)'은 올 봄 학기 지원자가 몰려 경쟁률이 3대 1을 넘어섰다.
변창구 서울대 인문대 학장은 "많은 CEO들이 경영학 지식만으로는 미래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기업을 이끄는데 한계가 있다고 느끼던 차에 최근 금융 위기와 아이폰 열풍이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 것 같다"고 분석했다. 변 학장은 "확실한 통치 철학이 있는 국가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처럼 기업 역시 CEO들은 역사, 문학,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자신의 경영철학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고 덧붙였다.
특히 최근 들어 문화예술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산하 문화예술교육센터가 시작한 '최고경영자 문화예술 과정(CAP)' 에는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 민형동 현대홈쇼핑 사장 등 400명 가까운 기업인, 정ㆍ재계 인사들이 거쳐갔다.
고려대 박물관은 2007년부터 '문화예술최고위과정(APCA)'을 진행하고 있고, 2008년 말 세종문화회관이 '세종르네상스'를 시작했다. 서울 정동 성공회성당 수녀원이 주최하는 'CEO와 함께 하는 인문 공부'에서는 근ㆍ현대 미술 등을 주제로 한 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윤은기 aSSIST 총장은 "전통문화예술 체험을 통해 문화 경쟁력과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CEO들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특히 고객과의 소통, 감성 경영의 중요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CEO들에게 문화 리더로서 거듭날 기회"라고 평가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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