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전단지 나눠주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대개 받아준다. 심지어 먼저 손을 내밀기도 한다. 예전에 이 아르바이트를 해본 경험이 있어서 이걸 받아줘야 저들이 집에 일찍 돌아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별로 착하지도 않은 주제에 일종의 선행이라 생각한다.
비슷한 의도로 거의 매일 반복하는 행동이 있는데 바로 텔레마케터 전화 받아주기다. 여기에는 약간 변태적인 구석도 있다. 핸드폰이나 인터넷전화가 울리면 거기에 뜨는 번호를 보고 카드회사 내지 통신회사, 보험회사 등에서 나의 계좌를 노리고 출동한 상담부대원의 전화란 사실을 안다. 그들이 어떤 인사말로 시작해 어떤 식으로 본론으로 접근할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런 귀찮은 전화는 피하면 될 텐데 마음을 다잡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급성 복통을 앓고 있다는 컨셉트로 선수를 친다. '아아, 제가 지금 아파서 통화를 못하겠는데 무슨 일이시죠?' 그러면 대개 상담원들은 종일 달달 읊은 용건을 서둘러 말한 후 나를 해방시켜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타인의 생업에 조금은 일조했다는 묘한 성취감을 느낀다.
물론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집요한 상담원에게 잘못 걸려 지금은 바쁘고 돈도 없으니 제발 봐달라고 부탁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또 간혹 상담원의 말을 일부러 거칠게 자르며 그날의 화풀이를 하고는 자책에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전화에 필요 이상 반응하는 나를 보고 주위에서는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매번 쉽지 않은 일이다.
특별히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고충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다. 항상 웃는 얼굴로 '네네' 거리다 우울증에 걸린 젊은 여자 상담원의 사연 때문이다. 하루 종일 고객의 불평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온 그에게 유일하게 위안을 주는 존재는 바로 헬로 키티 인형이었다. 그 상담원이 키티 인형을 좋아한 이유는 고객님들처럼 함부로 막말을 쏟아낼 '입'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상담원의 이야기는 조금 충격이었다.
물론 어느 때부터인가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홍보전화들은 개인정보유출이라는 차원에서 공포이다. 소비자로서 부당한 대우에 항의해야 할 경우 상담원들과의 일전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기계적으로 숙련된 친절 앞에서 가끔 당신들은 당해도 싸다는 듯 불쾌한 감정을 가학적으로 쏟아내는 나를 보자면 퍽 실망스럽다. 아무래도 더 떳떳이 소리를 높일 수 있는 입장이다 보니 역의 처지를 생각하는 것도 더 쉬울 듯싶다. 오직 고객 확보를 위해 개인적 감정을 억누르며 만들어낸 상냥한 목소리가 그저 소음 공해로 취급될 때 그 목소리들의 기분을 말이다.
앨리 러셀 혹실드는 저서 에서 개인의 고유한 '감정'이 상품화 될 때 감정노동자나 소비자 양쪽 모두 진짜 '감정'에서 소외되는 현실을 꼬집는다. 거대 시스템 차원에서 보자면 고객님이나 상담원이나 그저 도구에 불과하지만 미소와 친절이 주노동이 된 측에게 웃음의 의미는 사뭇 다를 것이다. 어떤 상담원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듣다가 에서 찰리 채플린이 후유증을 앓듯 이 분도 화내야 될 때마저 이런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상상한 적이 있다.
워낙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까지 해 본다. 한참 작업할 때 걸려오는 마케팅 전화는 확실히 짜증나지만 결국 내가 지금 일을 하듯 이들도 노동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확 인상을 쓰다가도 춘곤증이 쏟아지는 오후 노동의 고단함이나 나누자는 심정으로 전화를 받게 된다. 그리고 최대한 친절히 거절의 뜻을 전하게 된다. 이 고객님의 진심을 담아서 말이다.
이지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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