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덩치 큰 아줌마들이 불편한 책걸상에 쪼그리고 앉아 공부하기 힘들었는데 너무 좋은 선물을 받았습니다.(일성여고 1학년 5반 백분기ㆍ51세)
#2. 옷 전부 뜯겨져 걸상에 테이프 붙이고 방석을 깔아야 했는데 지금은 감촉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일성여고 2학년 5반 한정화ㆍ58세)
#3. 피아노를 눌러보았어요. 그 신기한 소리에 맞춰 선생님과 재미있는 음악수업을 할 수 있게 돼 감사합니다.(양원초교 2학년1반 한춘경ㆍ69세)
이달 19일 서울 마포구청에 135통의 편지가 한꺼번에 배달됐다. 이메일과 메신저가 일상화한 요즘 이렇게 많은 편지를 받는 것은 낯선 광경이다. 당연히 공무원들의 관심도 쏠렸다. 규격 편지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글씨체는 영락없는 초등학생의 글이었다. 띄어쓰기와 맞춤법도 간혹 틀렸다. 일부는 멋을 부릴 요량으로 보라색과 분홍색 편지지에 활자를 넣었지만 '학생 냄새'가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상대로 편지를 보낸 이들은 모두 학생이었지만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다. 마포구 염리동의 평생교육시설인 양원초교와 일성여중ㆍ고교에 다니는 할머니와 아줌마들이었다.
50~60대 중년 여학생들이 구청에 감사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구청은 5,700만원의 교육경비 보조금을 들여 중ㆍ고교 책걸상을 새 것으로 교체했다. 초등학교 17개 전 학급에 대해서는 디지털 피아노와 수업용 실물 화상기 한 대씩을 지원했다.
이번에 책걸상이 교체된 일성여중ㆍ고교는 25년 전 구입한 구식 책걸상을 그대로 사용해왔다. 일반학교에서 쓰던 것을 재활용한 것도 있었다. 일성여고 2학년 한정화(58)씨는 "교실 책상 높낮이가 제각각 인데다 곳곳에 홈이 파여 있어 옷이 뜯겨지기 일쑤였다"고 털어 놓았다. 다른 학생은 "등받이가 딱딱한 의자에 5시간 동안 앉아 있다 보면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적도 있었다"며 바뀐 책걸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디지털 피아노도 할머니들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 현재 양원초교 학생들의 평균 연령은 65세다. 최고령인 88세 할머니도 만학의 꿈을 불태우고 있다. 그 동안 음악시간에 쓰였던 풍금은 페달을 밟아 음을 내는 고풍스런 수동식이었는데 그나마도 몇 대 안 돼 음악시간마다 아줌마와 할머니들이 풍금을 이리저리 옮겨야만 했다. 2학년 지연춘(65)씨는 "그간 악기 없이 육성으로 음악교육을 받았는데 이제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돼 정말 기쁘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실물 화상기도 예상 외로 호응을 얻었다. 양원초교 4학년 이정남(59)씨는 "화상기 덕분에 분필가루가 날리지 않는 교실에서 공부하게 돼 너무 좋습니다. 글씨도 크게 확대돼 저희처럼 나이가 많아 시력이 안 좋은 학생들에겐 특히 유익해요"라며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최근 양원초교에 합류한 다문화가정 주부도 감사의 펜을 들었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1학년 응웬티 하미씨는 "말과 글을 모르는 게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좋은 악기 보내 주신 점 고맙습니다"라고 편지에 적었다. 현재 초등학교와 중ㆍ고교에는 20여명의 다문화가정 주부들이 다니고 있다.
교육환경 개선으로 학생들을 다시 한번 '어른스럽게' 만들었다. "늦게 공부 시작했지만 배우고 익힌 것들을 꼭 사회에 환원할게요."(백분기 학생) "쾌적한 교실에서 신바람 나게 공부할 수 있게 된 만큼 남의 사정을 헤아려 줄 아는 넉넉한 사람이 되겠습니다."(이정남 학생)
1963년부터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온 이선재(75) 교장은 "학생들은 학교를 다녀야 할 때 가족을 부양하느라 배움의 기회를 놓치고, 결혼 후에는 자식교육에 힘을 쏟느라 자신을 포기한 여성이 주변에 많다"며 "산업화 과정에서 자신을 희생했던 분들에 대해 최소한의 교육여건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편지를 읽어본 강희천 마포구 교육지원과장은 "배움에 대한 열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지만 그늘진 곳에 있다 보니 사각지대에 있었다"며 "뒤늦게나마 지원할 것을 지원한 것뿐인데 어르신들한테 이런 감사편지에 받으니 오히려 부끄럽다"고 머쓱해했다.
양원초교는 일반초등학교처럼 1~6학년 전 학년을 갖추고 있지만 한 학년이 8개월 단위로 4년 12학기제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 1,300여명의 만학도가 공부를 하고 있다. 일성여중ㆍ고교에도 각각 600여명의 여성들이 재학 중이다.
강철원 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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