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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사과꽃 피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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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사과꽃 피는 저녁

입력
2010.04.2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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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사과꽃이 피었다는 편지 받았습니다. 어떤 마술로 편지 속에 꽃피는 과수원을 모두 담아 보냈는지요. 편지봉투를 여니 제 눈앞에 신기루처럼, 하얀 사과꽃으로 덮인 과수원이 펼쳐집니다. 싸-하며 누님의 눈물 같은 꽃향기도 퍼져 나옵니다. 저는 눈을 감고 누님의 사과꽃을 만나러 갑니다.

마지막 버스에서 내려 한 10분쯤 평화롭게 걸어갑니다. 돌담으로 이어진 마을 안길을 천천히 따라가다 산자락에 미사보를 펼쳐놓은 듯, 하얗게 꽃을 피운 누님의 사과 과수원을 봅니다. 삼월 보름, 만월의 달빛을 받아 빛나는 사과꽃 피는 저녁에 숨어 울고 있을 누님의 눈물방울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누님. 저는 아직도 누님이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고 사과 농부가 되었는지 속 깊이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제가 짓궂게 꼬치꼬치 물을 때마다 '세상에 사과할 일이 많아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말씀하시는 뜻을 헤아려볼 뿐입니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지만 그는 평생을 안경알 깎는 일로 살았습니다.

그 철학자에 비해 사과나무를 심고 사는 누님이 제게 더 위대합니다. 사과꽃은 나무가 피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피운다는 것을 누님에게 배웠으니까요. 허나 세상은 아직도 사과가 붉게 익어 주렁주렁 달릴 때를 즐거워할 뿐 사과꽃이 피는 아름다움을 알지 못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정일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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