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고, 깎고, 자르고, 다듬고…. 길이 45㎝짜리 거북선 모형 하나를 완성하는데 거치는 공정만 무려 105가지다. 각각 500개가 넘는 목재와 철제부품이 필요하고, 거북선 철갑판에만 철로 된 침 1,900여개를 일일이 꽂아야 한다. 1㎜라도 오차가 생기면 조금씩 밀려 금새 전체 모형 자체가 일그러지는 고난도의 작업이다. 임종수(57)씨는 수천 개 조각들이 정교하게 제자리를 찾아 조화를 이뤄야만 위용을 드러내는 모형 거북선 제작에 장장 30년 세월을 바쳤다.
마침 4월28일은 충무공 탄신 465돌이다. 천안함 침몰사고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탁월한 전략과 리더십이 부각되는 충무공의 삶에서 거북선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거북선이 환갑을 앞둔 임씨에겐 어떤 의미일까. 26일 그를 만났다.
"엉터리 거북선 창피해, 차라리 내가 만들자"
거북선을 건조하는 작업장은 초라했다. 서울 중랑구 면목동의 골목길을 구비구비 돌아 닿은 곳은 3층 건물 위에 임시로 지은 옥탑방이었다. 14㎡(4평) 남짓한 공간엔 작업 중인 모형 거북선과 주재료인 향나무, 여러 공구들이 흩어져 있고, 작업장 곳곳엔 나무분진이 수북했다.
허름한 작업장 모습과 달리 임씨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거북선은 대한민국 해군의 정신적 표상이자 세계최고 조선기술을 갖게 한 원동력이에요. 대한민국 대표브랜드라고 해도 손색이 없죠." 거북선과 더불어 반평생을 보냈으니 애정도 남다를 터. 그가 거북선과 연을 맺은 사연은 이렇다.
해군 출신으로 1972년부터 3년간 전남함에서 갑판수병으로 복무한 임씨는 대학졸업 후 한동안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았다. 그의 삶을 바꾼 것은 77년 일본출장 길에 김포공항 면세점에서 우연히 진열된 거북선을 보면서부터였다. 도금은 화려했으나 모습은 조잡하기 그지 없었다. '저렇게 만들어 면세점에서 팔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더니 서서히 낯이 뜨거워지고 부아가 치밀었다. 출장 내내 머리 속에서 거북선이 둥둥 떠다녔다.
귀국하자마자 모형 거북선 제작에 들어갔다. 기계공학을 전공해 기계랑 가까웠지만 목공은 해본 적이 없었다. 눈대중으로 거북선 모형들을 살피고, 모르는 건 목공소를 찾아 다니며 자문을 구했다. 5개월이 걸려 첫 작품을 완성했다. 엉성했다.
오기가 생겼다. 역사 공부 등 정확한 고증부터 했다.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거북선과는 전혀 다르지만 정조시대에도 거북선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거북선 모형이나 그림이 있는 곳이면 짬을 내 어디든 달려갔다. 전문가들을 수소문해 제작정보를 귀동냥하기도 했다.
천안 독립기념관, 아산 현충사, 용산 전쟁기념관, 진해 해군사관학교 등은 그의 주말과 휴일 일터였다. "한 번은 현충사에서 거북선 사진을 찍으려는데 직원이 못 하게 하는 거에요. 차라리 그림으로 그려가겠다고 했더니 일반 관람객에게 방해가 되니 역시 안 된다는 거에요. 관람시간 후에 남아 그렸다니까요." 소일거리로 시작한 일이 차츰 천직이 돼가고 있었다. 그가 만든 거북선도 차츰 모양새를 갖춰갔다.
거북선에 미쳐 사고를 치다
결국 99년 회사를 그만두고 아예 모형거북선 제작사인 '귀선'(龜船)을 차렸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불혹)는 마흔을 여섯 해나 넘겼지만 그는 거북선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셈이다.
외환위기 여파로 살기 팍팍했던 시절이라 가족들이 좋아할 리 만무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직원 2명과 지금의 옥탑방에 둥지를 틀었다. "아이들도 다 커서 취직해 제 앞가림하고,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면 행복한 거죠. 덤으로 사람들이 저를 통해 거북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좋고요."
본격적인 제조활동에 나서며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선체 재료 교체. 본디 모형 제작엔 값싸고 작업이 편한 공예용 나무인 '마티카'를 쓰는 게 보통인데, 향나무로 바꿨다. 단가는 올라가지만 질감이 살아나기 때문이란다. 거북선다운 거북선을 만드는 게 일생의 꿈인 그에겐 당연한 선택이었다.
세상은 그의 열정과 까다로움을 차츰 알아보기 시작했다. 전국의 모형함선 고수들이 매년 모여 자웅을 겨루는 '해군참모총장배 전국모형함선 경연대회'에서 2002년과 2003년 연거푸 금상을 차지했다.
2003년엔 조달청 정부조달 물품으로 지정됐다. 그의 작품이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문화관광상품으로 거듭난 것. 캐나다와 리비아 등 한국대사관에는 지금도 그의 작품이 가장 먼저 대사관 손님을 맞고 있다고 한다. 주문량의 70%가량이 외국으로 간다.
그의 모형 거북선은 벽걸이 액자형과 표구형, 스탠드 장식용과 기본형 등 네 가지. 크기도 전장(全長)이 10㎝~1.15m 등으로 다채롭다. 99년부터 지금껏 만든 작품만 300여개다. 그 중 그는 '독도는 우리땅'이란 작품을 최고로 꼽았다. 동도와 서도 사이를 거침없이 누비는 거북선을 표현한 이 작품은 일본의 독도망언이 이어지던 2007년 만들었다.
그는 그러나 사람들의 무관심에 속상해 했다. "일본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자국의 수군을 전멸시킨 거북선을 오히려 좋아하고 경이롭게 바라보는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북선에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웬만해선 작업장을 비우지 않는 그가 이날만큼은 주섬주섬 겉옷을 챙겼다. "천안함 후배들 분향소에는 다녀와야죠." 좁은 작업장에선 눈을 부릅뜬 거북선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태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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